어른들이 어린이를 보듯이, 어린이도 어른을 본다. - 64쪽 나는 어린이였고, 어린이의 엄마였으며, 중·고·대학생 시절 10년을 제외한 모든 해, 그러니까 사십년 넘는 세월을 어린이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서는 더욱,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고 기쁨인지 새삼 느끼고 있다. 한편으로 그 무게감도 크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닫고 있다. 나는 아이들 등굣길 아침 맞이를 한다. 겉으로 보기엔 내가 아이들을 맞이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만, 실상 내 쪽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얻는다. "이발했구나. 깔끔하니 잘 어울리네", "오늘은 공주 치마 입었구나. 예쁘다", "아침 안 먹었니? 교실 들어가기 전에 다 먹어",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고 다니자", "추운데 학교 오느라 고생했어", "마스크 하지 그랬어. 오늘 바람이 심한데", "어서 오세요, 좋은 하루 보내자" 등등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말을 건네고 그들의 안부를 확인하면서 나는 하루를 살아갈 어떤 '힘'을 받는다. 할머니 눈에 손자 손녀가 예쁘기만 하듯 학교장 눈에도 아이들이 이쁘기만 하다. 뭐든 자기 책임에서 한 발 물러나 있으면 관대해지는 법이다. 어린 생명들이 아침에 일어나 자신보다 큰 가방을 메고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참아야 하는', '나를 조절하며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애써야 하는' 공간에 하루도 빠짐없이 오는 것만으로도, 나는 아이들이 기특하고 고맙다. 그리고 아이들이 '기쁨'이 될 때가 정말 많다. 그들의 엉뚱함, 귀여움, 예의 바름, 당돌함, 놀이에의 몰입, 경쾌함, 생각보다 어른스러움, 기발함, 생각보다 심각함 등등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고 내 안에 어린이가 깨어나는 것 같다. '이 세상에 어린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린이도 어른을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민감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김소영 작가님의 <어떤 어른>(2024년 11월 출간)을 읽으면서 평생 '어린이'와 함께 생활하면서도 '노 키즈 존', '차별', '불평등' 과 같은 문제에 대해 세심하게 생각하지 못했구나 반성하게 된다. 공공장소에서 어린이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른바 '노 키즈 존'이라는 세련된 말로, 어린이라는 존재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노"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출입을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130쪽 '노 키즈 존'은 사라져야 한다. '어린이'라는 사실은 명백히 어린이의 정체성이다. 정체성 때문에 특정한 장소에 출입을 못 하게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어쩔 수 없이 차별이다. 이 차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다면, '노 휠체어 존'이, '노 시니어 존'이, 또 '노 무슨 무슨 존'이 생길 것이다. -264쪽 맞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차별'과 '배제'일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의논을 모으는 민주적 방법은 더디고 번거롭고 쉽지 않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