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대통령이 쏘아올린 '환단고기', 위서 넘어 무엇을 물어야 할까

나는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상고사를 둘러싼 여러 갈등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 <환단고기>라는 책도 읽었다. 그 뒤로 한동안 이 주제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요즘 교회에서 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인문학 눈길로 함께 읽으며 다시 이 문제와 마주하게 되었다. 마침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언급하면서, 한국 사회에 오래 쌓여 있던 역사 인식의 갈등이 다시 떠올랐다(관련기사: 대통령 '환빠' 언급 일파만파... "그러면 반지의 제왕도 역사" https://omn.kr/2gdqh). 주류 역사학계, 이른바 강단 사학은 곧바로 반응했다. <환단고기>는 "역사성이 없는 가짜 책이며 따질 값어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이 책을 말하거나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비학문적', '사이비'로 몰아붙이는 태도도 되풀이되었다. 하지만 이 논쟁은 한 권의 책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리는 데서 끝날 수 없다. 오히려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물음은 그 너머에 있다. 왜 이 책은 자꾸 사회적 논쟁의 한가운데로 불려 나오는가. 왜 '위서'라는 판정에도 이 논쟁은 사라지지 않는가. 사실이냐 아니냐보다 먼저 물어야 할 것 역사를 다루는 데에는 언제나 두 갈래가 있다. 하나는 사실을 따지는 자리이고, 다른 하나는 뜻을 살피는 자리다. 강단 사학은 앞자리에 매우 엄격하다. 증명되지 않으면 역사로 다룰 수 없다는 원칙은 학문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 하나로 모든 물음을 대신할 수 있다고 여길 때 문제가 생긴다. 성서 해석을 떠올려 보면 이 점은 더욱 또렷해진다. 오늘날 성서학은 창조 이야기나 예수의 탄생과 부활을 두고, 그것이 글자 그대로 있었던 일이냐만을 놓고 다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야기들이 어떤 상징과 세계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해석의 자리가 된다. 신화적 말과 상징은 곧바로 거짓이 아니라, 사람이 역사와 삶을 이해해 온 오래된 생각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눈길로 보면, 단군과 상고사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유난히 굳어 있다. 단군을 '신화'로 묶는 순간, 그 이야기는 곧바로 역사도 학문도 아닌 자리로 밀려난다. 그러나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왜 이 이야기는 수천 해 동안 되풀이되어 전해졌는가. 그 안에는 어떤 공동체의 기억과 삶의 뿌리가 담겨 있는가. <환단고기>도 마찬가지다. 설령 이 책이 뒤늦게 엮인 글로 밝혀진다 해도, 그 뜻이 몽땅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는 한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느꼈던 역사 상실의 아픔, 스스로의 존엄을 되찾고자 했던 바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뜻의 자리를 읽어내는 일까지 외면한다면, 그것은 학문을 지킨다기보다 설명해야 할 몫을 피하는 태도에 가깝다. 식민 사관과 강단 사학의 닫힌 틀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