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날' 행사의 실체... 그들이 관리하던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

2005년 초, 아직 봄을 맞지 않은 계절이었다. 그 당시 평택은 용산 미군 기지의 확장 이전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뉴스에서 반대 운동을 접하던 나는 당시 학생 기자로서 '기지촌'의 현재를 취재하러 평택을 찾았다. 사실 당시의 관심사는 주민의 기지 이전 반대 운동 그 자체보다는 '기지촌'이라는 공간이었다. 나에게 '기지촌'은 기사와 시사 프로그램에서 접하던 미군 범죄의 온상, '금단의 공간'이자 불법과 불온의 중심지였다. 그 공간의 현황을 학생 사회에 공유하여 미군 기지가 지역사회에 미친 악영향은 무엇인지 비판적으로 마주하고자 했다. 그런데, 취재를 마치고 돌아갈 무렵, 당시에는 충격으로 남은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We love USA Army -All of the Residents.(우리는 미 육군을 사랑합니다 - 모든 주민 일동) " 그리고 양쪽 길을 따라 나란히 세워져 있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들어왔다. 지역에서는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관계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그 이미지와 의문의 답은 이후 많은 연구를 진행하며 찾을 수 있었다. '기지촌'은 낙인의 공간을 넘어 미군이 지역사회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이 집약된 장소였다. 미군 기지와 지역사회: 경계와 그 너머의 공간 그래서, '기지촌'에는 어떤 관계가 조성되고,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이른바 '기지촌 여성'이라고 불리던 미군 '위안부'는 '기지촌'에서 미군과 주민이 형성하는 여러 관계 중 대표적인 사례이다. '기지촌 여성'은 한국 정부와 미군 간 군사 이해관계가 부합하는 가운데 특정 공간에서 허용된 성매매에 종사하던 '기지촌' 구성원이었다. 이와 함께 미군의 소비에 의존하여 생계를 이어갔던 상업 종사자들도 '기지촌'과 함께 떠오르는 이미지를 이룬다. 그런데, 미군은 '기지촌'에서 소비자만이 아니었으며, 성매매로 성병이 발생하자 이로 인한 병력 손실을 우려하며 통제에 나선 수동적 대응 주체만도 아니었다. 전쟁의 포성이 멈췄지만, 미군은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다. 그리고, 고정된 기지의 주변 지역사회를 기지 운영의 일부로 포함하였다. 이는 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미군은 지역 주민과 관계를 형성하며, 지역사회를 일종의 '관리 구역'으로 설정하였다. 일반적으로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는 기지의 경계가 분명했지만, 미군의 권한은 그 경계를 넘어 기지 주변 지역사회에 적용될 수 있었다. 애초에 기지는 "특수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진지이자 외국군의 활동이 전개되는 주둔지"이다. 외국 군대의 치외법권적인 강력한 자위(自衛)가 보장되는 구역으로 주권 개념과의 충돌 가능성이 내재되어있는 공간이다. 즉 미군 기지는 마치 '작은 미국'처럼 미국의 주권 아래에서 미군의 자율성과 권한이 보장된다. 그런데, 그 권한은 기지 내부에 한정되지 않았다. 이 권한은 1966년 체결된 한미 간 '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드러났다. 주둔군지위협정 제3조 1항: "미국은 시설과 구역 안에서 이러한 시설과 구역의 설정, 운영, 보호 및 관리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다" (후략) 조항만 보면 미군의 시설과 구역 안으로 권한을 제한한 것 같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 3조의 합의의사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3조에 대한 합의의사록: "비상시의 경우에 미국 군대는 시설과 구역의 주변에서 동 군대의 보호와 관리를 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합의한다" 이는 미군이 군사적 목적 혹은 기지 및 군대의 안보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지 외부에도, 그것이 한국의 주권 영역이자 민간 공간임에도 권한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한국인에게 기지는 명백한 경계였지만, 미군에게 기지와 주변 지역사회는 분리된 공간이 아니었다. 기지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미군이 관리해야 하는 공간이었다. 1957년의 미8군 자료에 의하면 지역사회(community)는 "군 시설이나 인력이 주민에게 특별한, 혹은 경제적 영향을 미치는 지역"이었다. 즉 기지 주변 지역사회는 미군의 영향력 속에서 그 정체성을 형성해 갔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