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째 미완인 우리집, 부부를 버티게 한 것

6년 전, 1년 6개월을 기다려 입주한 우리 집은 심각한 미완 상태였다. 우리가 산 땅은 3000평 단위로 묶여 있어 대여섯 명의 공동구매자가 순서대로 집을 짓고 지분을 나누는 구조였다. 도로 법률상 한 채씩 집을 지어야 하는 조건이라, 첫 번째로 공사를 시작한 우리 집은 마지막 순서까지 모두 지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운명이었다. 뒷산의 가파른 비탈면은 나중에야 평탄화될 예정이었고, 단지 도로가 다 갖춰져야 설계상의 현관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위험을 감수한 채 임시 출입로, 임시 현관, 임시 주차 공간을 이용해야 했다. 집 자체도 20%는 부족했다. 칠하지 못한 벽, 드러나 있는 전선, 달리지 않은 문짝들. 철제 뼈대만 갖춘 가구는 입주 후 남편과 내가 완성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다. 해맑게 노는 아이들 사진에 함께 담긴 미완의 흔적들 앞에서 저절로 한숨이 났다. 상상 이상의 변수들 공사는 수차례 중단과 재계를 반복했다. 전세가 끝나 8개월 단기 월세살이, 엄마 집 두달살이, 필리핀 한달살이를 거쳤다. 떠돌이 생활 끝에 드디어 입주했건만, 수고가 무색하게도 겨우 자고, 씻고, 밥해 먹을 수 있을 수준이었다. 수납장이 없어 널브러진 살림 사이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꺼내 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임시 상황에 화가 치밀었다. 대놓고 감정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남편은 1년 6개월 동안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땅 구매와 공사의 중심이었던 사람이 잔금을 치르지 못해 빠지면서, 공사와 주인 잃은 땅의 공백을 메워야 하는 부담이 남편에게 지워졌다. 상수도, 도로, 지하수 개발과 같은 공동 영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공서와 업체를 오가는 일도 첫 번째 공사자인 남편의 몫이었다. 처음 짓는 집, 그것도 전문 업체에 맡기지 않고 직접 진행한 공사는 상상 이상으로 변수가 많았다. 기초, 단열, 골조, 외장 등 모든 공정마다 업체를 직접 찾고 조율해야 했다. 전달받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에 눌리는 것 같아 나는 어느 순간 생각을 멈췄지만, 책임의 최전선에 선 남편은 모든 상황을 끌어안고, 긍정하며, 묵묵히 공사를 끌고 갔다. 그렇게 지은 집에서 가족을 맞이하는 순간, 남편의 마음은 어땠을까. 설계부터 공사까지, 사계절을 야외에서 보낸 시간을 가족과 공유하는 순간이었다. 길어진 공사로 지친 마음과 외로움을 환호와 인정으로 보상받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난 이 미완의 집 앞에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굳어진 표정과 퉁명스러운 말투로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어렵게 지은 집이 이 모양이라니.' 내가 그리던 그림과는 너무 달랐다. 작아도 정갈한 공간을 좋아하는 내게, 이 집은 손댈 수 없는 영역이 너무 많았다. '산 넘어 산'인 문제들을 해결하며 여기까지 온 남편이 안쓰러우면서도,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원망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임시 거주와 독박 육아로 지쳐있던 나는 누굴 위로할 형편이 아니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