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의 향연 32] 송시열과 만동묘의 사대망령(2)

만동묘 짓고 사대의식에 매몰 송시열은 충청북도 청천면 화양리 화양동의 빼어난 경관을 사랑하여 이곳을 자주 방문하게 되었고, 1666년 이곳에 초당을 짓고 거처로 정하였다. 처음에는 화양동 제2계곡인 운영담 위에 다섯 칸 화양계당(華陽溪堂)을 지었다가 그 후 다시 제4계곡인 금사담(金沙潭) 위에 '암서재(巖書齋)'를 지었다. 송시열은 이곳의 절경을 보고 감흥에 젖어 시 한 수를 읊었다. 푸른 물은 성난 듯 소리쳐 흐르고 청산은 찡그린 듯 말이 없구나 조용히 자연의 뜻 살피니 내 세파에 인연함을 저어하노라. 송시열은 효종과 함께 청나라를 치는 북벌을 주장하면서 명나라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도와준 은혜를 잊지 못했다. 1671년 명나라 마지막 황제 신종(神宗)의 어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이란 넉 자를 구해 제5계곡인 첨성대 아래 암벽에 모각하여 놓고 이곳을 '존명사대(尊明事大)'의 근본도장으로 삼았다. 신종의 어필은 민정중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구해온 것이었다. 글씨의 원본은 새로 운한각(雲漢閣)을 지어 보관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의 사당을 별도로 지어 사본을 보관하면서 그 자리에 만동묘를 창건하여 유생들의 집합소로 삼도록 했다. 만동(萬東)은 선조의 어필 중 '만절필동(萬折必東)'에서 따왔다. 중국의 힘은 항상 동방의 조선을 옹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명나라는 이미 망한지 오래이고 청나라가 중원을 차지하여 조선은 정묘·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으면서 청국을 새 종주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여기서 참고해 둘 말이 있다. 1644년 이자성이 자금성을 함락하자 의종이 자살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은 임진왜란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았으므로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는 이유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인 숭정(崇貞)을 사용하였다. 숭정 연호는 20세기 초까지 300년이나 계속 쓰여 왔다. 병자호란으로 8년 동안이나 청국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봉림대군이 귀국하여 임금이 되고 북벌계획이 논의되면서 송시열은 중앙정계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따르는 유생들도 많았지만 정적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대륙을 석권한 청국을 '북벌'하기에는 조선의 힘은 너무 미약하고, 정계와 유생사회는 비생산적인 예송논쟁으로 날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