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가 종교인가 아니면 단순히 윤리사상인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종교설'의 논거는 은나라와 주나라 시대부터 숭앙의 대상이었던 '상제(上帝)' 와 '천(天)' 사상은 우주와 인간을 주제하는 초인간적·초자연적 절대신에 대한 숭경의 자취를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또 유교에서 중시하는 제사는 다른 종교들처럼 기복신앙(祈福信仰)의 중심을 이루기 때문에 어김없이 종교라는 주장을 편다. 한국사에서 유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국가지도이념으로 삼는 유교국가였다. 국가의 모든 시책과 기본질서가 유교에 뿌리를 두었다. 유교 중에서도 성리학이 중심이었고 이에 대한 비판은 사문난적으로 심판되었다. 여타 종교나 학문도 철저히 배격되어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었고 천도교 교주와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처형당하였다. 한국에 유교가 전래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대학(大學)'을 세운 것을 하한으로 잡는다. 이로부터 삼국시대·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왕조에서는 '국교(國敎)'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것도 유학자들이고 망친 것도 유학자들이었다. 조선 중기에 실학이 대두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면서 공리공담과 형식화,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면서 유학은 국가경영의 종교이념이 아닌 정쟁과 기득권 유지의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노론세력이 집권하면서 극심한 세도정치가 이루어지고 국정이 급속도로 문란해졌다. 왕대비의 장례를 3년상으로 치를 것인가, 1년상으로 치를 것인가 따위의 이른바 예송론(禮訟論)이 정치의 쟁점이 되고 여기에 유학자들의 생사가 걸리게 되었다. 예송논쟁에서 이긴 편은 살고 진 편은 죽었다. 국내판 '종교전쟁'이었다. '종교전쟁'의 승자는 노론세력이고 이들은 국가나 정부의 이익보다는 파당과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였고 종국에는 일제에 나라를 파는 매국적이 되었다. 망국에는 노론 주도의 세도정치에 가장 큰 책임이 따르고 이들은 대부분 친일파로 전락하였다. 유학자 또는 유림(儒林) 중에 충의로운 인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익현·송병선·유인석·황현·김도현 등 의병 지도자는 대부분이 유림 출신이었다. 또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한 민영환·조병세·홍만식 등도 유학자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유학자들은 기미년 3·1독립선언서에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천도교·기독교·불교계에서 33인이 민족 대표로 서명한데 비해 유교계는 철저히 외면한 것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