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개들은 밥 안 먹었어..." 의용소방대원의 끔찍한 증언

"김일성이 곧 통일을 시키니 각자 죽창과 쇠창을 만들어 집에 보관하시오!" 오창면에서 온 이가 사랑방 좌담회에서 건넨 말이다. 구룡리 전용찬은 밤손님(민애청 간부)의 말을 듣고 죽창을 만들어 집에 보관했다. 1947년 말,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는 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이 마을마다 조직되었다. 하지만 토지개혁 실시와 평등한 세상 건설을 주장한 민애청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와 경찰의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민애청원들은 대한청년단과 서북청년회 사무실에 끌려가 몰매를 맞고 좌익활동 전력을 고백해야 했다. 가입하지 않으면 친일파? 농민과 가난한 사람들만 민애청에 가입했던 것은 아니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게도 가입을 강요했다. 탑리 도성석은 마을의 민애청 활동가가 "다른 사람들 모두 들었으니 (너도) 가입해라"라고 해 가입했다. 어느 날 도성석을 포함해 탑리 청년 30명이 오창지서에 끌려갔다. "남로당에 가입했냐, 민애청에 가입했냐?"라는 추궁 중, 어떤 이가 민애청이라고 이실직고하자 연행자 전원이 경찰봉으로 구타를 당했다. 결국 '토지를 공평하게 나눠 준다', '품앗이를 해 준다', '비료를 무상으로 나눠 준다'는 달콤한 민애청의 주장에 혹했던 오창의 청·장년들은 좌익으로 몰렸다. 이들에게는 몰매와 전향이 강요되었고, 그렇게 도장을 찍은 것이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였다. 그 무렵, 청주경찰서 사찰계와 오창지서에서는 각 마을 구장을 통해 좌익단체(주로 민애청) 가입자 명단을 작성하고, 우익단체와 함께 좌익 검거 활동을 해왔다. 이미 작성된 민애청 가입자 명단과 함께 자수자 신문 결과를 토대로 좌익단체의 주동자급을 검거하여 청주경찰서로 보내고, 단순 추종자는 보도연맹 가입 대상자로 분류했다(진실화해위원회, '오창창고 보도연맹사건', 2008년).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는 과거 민애청원만이 아니었다. 마을별로 청·장년들에게 가입 강권이 있었고, "품앗이를 해 준다", "비료를 나눠 준다"는 내용으로 설득했다. 청원군 북이면에서는 해방 후 좌익단체에 가입하지 않으면 친일파로 몰리는 분위기였다. 북이면 석성리 2구 모영전(1921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좌익 활동가들이 주민들에게 "가입하지 않으면 친일파로 몰린다. 가입하면 비료를 준다"고 했다고 한다. 좌익단체 가입 권유자 중에는 여자들도 많았으며, 거의 매일 동네에 들어와 주민 다수가 도장을 찍었다. 모영전을 비롯한 석성 2구 청년들은 북이지서에 두 차례 불려가 "왜 좌익단체에 가입했냐"며 구타를 당했고 "비료 준다고 해 도장을 찍었다"라고 답했다. 좌익단체에서 탈퇴한 석성2구 주민들 13명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정작 본인도 모르게 보도연맹에 가입된 경우도 있다. 북이면 신기리 한금수(1929년생)는 마을 이장이 도장을 가져가 자신도 모르게 보도연맹 명부에 도장을 찍은 경우였다. 시도 때도 없이 징을 쳐 '징징징~' "쟁기질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뭔 또 소집여?" "글쎄 말여. 지랄같네." 마을의 잔심부름을 하던 소염의 징 치는 소리에 보도연맹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농민들이 모내기 전 한창 쟁기질을 하던 1950년 5월이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