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질리지 않는 '최애' 맛집, 반백살 딸이 생일에 받은 것

"우리 시루떡 해 먹을래? 쌀은 집에서 조금 빻으면 돼. 절구 큰 거 있다. A네가 사준 게 있거든." " 좋아, 그럼 쌀은 내가 빻을게 내가 집에 갈 때까지 쌀 빻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엄마와 나는 그렇게 내 생일에 시루떡을 해 먹기로 했다. 지난 19일, 일주일 전부터 금요일 아침에 가겠다고 큰소리쳤지만 게으름을 피우다 결국 점심 때가 돼서야 출발했다. 늘 그렇듯, 엄마는 항상 그곳에 있기에 별다른 예고 없이 시골집으로 향했다. 엄마도 '오면 오는가 보다' 하시는 분이라 따로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하려고, 아니 빨리 가고 싶어 택시를 탔다. 날씨는 맑고 포근했다. 엄마는 내 생일마다 시루떡을 해주셨다. 방앗간에서 쌀을 조금 갈아와 집에서 직접 쪄내곤 하셨다. 마흔 살까지 엄마와 함께 살며 해마다 그 시루떡을 맛보았다. 집을 떠난 뒤로는 생일에 굳이 내려가지 않았고 시루떡도 그렇게 멀어졌다. 그런데 이번 생일은 토요일. 마침 주말이다. 오랜만에 집에 갈 수 있었다. 엄마의 시루떡 엄마가 시루떡을 해 먹자고 했을 때 예전 같으면 뭘 그런 걸 자꾸 하냐며 흘려보냈을 텐데, 이제는 그 말씀에 박자를 맞춰 주었다. 엄마 말투에서 풍겨 나오는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엄마가 떡이 먹고 싶어서 떡을 만드는 건 아닐 테다. 냉동고에는 이웃들이 갖다 준 떡들로 가득 차 있고 매일 통화 때마다 "오늘은 호박죽을 먹었다" 또 어떤 날은 "뜨끈뜨끈한 백설기를 먹었다"라며 이웃들이 주는 별미 음식들로 넘쳐 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가 왜 시루떡을 만드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 년 전, 오월 단오즈음 집에서 찹쌀을 조금 빻아 엄마랑 취인절미를 만들어 먹은 적이 있다. 그때의 맛이 아직도 기억난다. 정확히는 인절미의 맛보다 엄마랑 같이 희희낙락하며 인절미를 만들었던 그 과정들이 더 생생하다. 그날, 내가 취인절미가 먹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가 " 우리 한번 만들어 먹어볼래?"라고 한 것이다. 마을에 하나 있는 방앗간은 자주 문을 닫았고 명절 아니면 소량의 쌀을 갈아달라 하기 쉽지 않아 직접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떡 만들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신이 나서 찹쌀을 작은 절구에 조금씩 넣으며 빻았고 엄마는 미리 데워둔 찜솥에 취와 빻은 쌀을 섞어 쪄냈다. 그리곤 도마 위에 취떡을 올려놓았다. 나는 방망이로 떡메질을 시작했다. 엄마는 "옛날엔 다 저렇게 집에서 해 먹었는데" 라며 떡메 치던 시절 이야기를 하며 기분이 들떠있었고, 나는 예전 회사에서 인절미 체험 갔을 때 힘든 떡메를 아무도 치려고 하지 않아 혼자 떡메 쳤던 경험담으로 응수했다. 인절미는 떡메를 많이 칠수록 더욱 쫄깃해진다. 나는 그때를 상기하며 취떡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떡메로 사정없이 내리쳤다. 더 이상 빠질 힘이 없을 때까지. 그리고 마무리로 콩고물을 묻혀 버무렸다. 고소한 콩고물 향을 맡으며 서둘러 맛을 보았다. 맛이 기가 막혔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이며 엄지 척을 했다. 공들인 시간에 비해 양은 많지 않았지만 함께한 시간들이 좋았다. 엄마와 나의 소꿉놀이였다. 그 소꿉놀이를 또 하러 간다. 시골집이 가까워지자 겨울나무숲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세가 있어 보이는 택시 운전기사가 " 어? 자작나무가 있네요... 저거 다 자작나무예요. 저 나무가 주변 공기를 맑게 해 준데요"라고 하셨다. 저게 자작나무라고? 수십 년을 다녀도 알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눈여겨본 적도 없다. 그저 많고 많은 나무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자작나무였다니.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