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익산시 망성면 금강 가까운 작은 봉우리에 나바위성당이 있다. 오늘날은 '1845년에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 성지'로 알려져 있다. 다만 1907년에 이 성당이 세워질 당시에는, 이곳이 김대건 신부의 귀국 지점이라는 사실이 아직 분명히 인식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은 후대의 가톨릭 문서의 기록 연구를 통해 역사적 의미가 확정된 장소로, 기억과 장소가 시간차를 두고 뒤늦게 결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 역사에서 '강을 통해 들어온 신앙'을 상징하는 장소이다. 지난 23일 아침, 호남선 철도 강경역에서 내렸다.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의 성지'를 순례하는 걷기 여행을 시작하였다. 강경역에서 나바위성당까지는 익산으로 향하는 넓은 도로를 따라 3km 거리였다. 중간쯤 충청남도 논산 강경읍과 전라북도 익산 망성면의 접경을 넘어섰다. 아담한 산봉우리 기슭의 성당 첨탑이 멀리서도 식별되었다. 나바위성당은 금강둑에서 600m 남쪽에 있는 화산(華山, 40.4m)의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었다. 본당 건물의 건축 양식은 한옥과 서양식 고딕이 절충된 형태였다. 초기에는 한옥 구조를 기본으로 했는데, 후에 서양식 고딕 양식의 벽돌 종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목숨을 맡기기 어려운 배"를 탄 사람 본당 건물을 지나 화산 정상으로 올라갔다. 김대건 신부의 성상(聖像)이 서 있었다. 이 성상의 재료는 함열석이며, 성상 높이는 4m라고 한다. 이 성상 옆의 계단을 올라가면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김대건 신부 성상 가까이 성모 동산이 있다. 이 자리는 전라북도 삼대 명당자리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십자가의 길' 계단을 오르니, 화산 정상에 김대건 신부의 순교기념비가 있었다. 순교 기념비 옆의 망금정(望錦亭) 아래로 멀리 금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 망금정에서 금강의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었고, 이 화산 끝자락에 너른 바위가 나바위로 불렸다고 한다. 예전에는 이곳 망금정 아래 화산 발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는데, 1925년 무렵에 간척사업으로 금강 물줄기가 바뀌어 평야가 된 오늘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 망금정 뒤에 거대한 바위가 있고, 왼쪽으로 돌아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다. 금강을 바라보는 망금정이 서 있는 바위 단애에 마애삼불(摩崖三佛)이 부조되어 있었는데, 풍화로 윤곽이 희미하였다. 화산 기슭에 내려섰다. 멀리 금강둑 안으로 평야가 가득했다. '나바위 이야기, 수탉의 전설' 안내판과 수탉 바위라고 불리는 풍선처럼 둥근 바위가 있었다. 저만치 거리에서 라파엘호(The Ship Raphael)가 선체 모습을 드러냈다. 소형 목선 라파엘호. 김대건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조선 입국을 위해 소형 목선을 탔다. 출항일은 1845년 8월 31일이었다. 동행자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그리고 조선인 신자 11명이었다. 라파엘호는 서해의 조류와 풍향을 계산해 항해했으며, 제주 차귀도 인근에 표착한 뒤 다시 서해를 따라 북상해 금강으로 진입했다. 기록에 따르면 1845년 10월 12일 저녁 8시 무렵, 배는 이곳 나바위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다블뤼 신부의 기록을 토대로 한 연구에 따르면 라파엘호는 길이 약 9.74m, 너비 4.22m, 깊이 2.59m에 불과한 소형 목선이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연안 어선보다도 작은 규모로, 장거리 항해에 적합하다고 보기 어려운 배였다. 라파엘호는 조선식 선체에 중국식 돛과 키를 덧붙인 임시 구조였고, 돛은 거적을 꿰매 만든 것이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러한 조건은 항해 내내 생명의 위협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라파엘호는 항해 도중 여러 차례 폭풍우를 만났다. 특히 동중국해를 건너는 과정에서 거센 풍랑으로 돛과 키가 부러지는 사고를 겪었고, 배 바닥 틈으로 바닷물이 스며드는 상황도 발생했다. 다블뤼 신부는 이 배를 두고 "목숨을 맡기기 어려운 배"라고 기록했다. 일행은 돛과 키를 임시로 수리하고, 인력을 동원해 물을 퍼내며 항해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성직자와 신자들은 함께 기도하며 결속을 다졌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는 귀국 이후 선교와 연락 임무를 수행하다 1846년 황해도 일대에서 체포되었다. 프랑스 선교사 입국을 위한 항로 개척이 발각되면서였다. 그는 한성으로 압송돼 혹독한 문초를 받았지만 끝내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한강 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새남터는 한국 최초의 사제 순교지로 자리 잡았고,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신자들에 의해 수습돼 미리내에 안장되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