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42.195km 풀마라톤을 완주한 적이 있다. 기록은 4시간 48분. 평소 농구와 축구를 취미로 하던 시기였지만 별도의 달리기 훈련은 하지 않았었다. 이십 대의 패기로 달렸다. 35km 구간부터는 좀비처럼 한 발을 끌며 달렸다. 훈련 없는 무모한 도전의 결과는 호되었다. 완주 메달과 발 한쪽, 흔한 말로 '쿨내 나는 거래'였다. 결국 일주일간 한쪽 발을 절뚝거렸다. 마라톤, 이제는 안녕. 이별한 줄로만 알았던 달리기가 복싱을 시작한 내 삶에 슬며시 나타났다. 올해 서울신인선수권복싱대회를 준비하면서 주 2회 달리기 훈련을 시작했다. 새벽 훈련을 수행할 열정은 없었지만, 달리기 훈련마저 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 있는 스포츠 양심이 찔려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는 다시 달리고 있었다. 늘 빗나가는 예상... 빙판과 눈 위를 달리는 겨울 마라톤 지난 12월 6일, 인생 첫 하프마라톤을 완주했다. 참가한 마라톤은 제22회 한강시민 마라톤대회다.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한강을 따라 달리다가 반환점을 돌아오는 코스다. 날씨는 굉장히 추웠다. 입김이 나오고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날씨. 대회장에 모인 참가자들이 함께 준비운동으로 몸을 풀었다. 오전 9시, 하프마라톤 참가자들이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전날 눈이 많이 와서 바닥에 눈이 쌓였지만 추운 날씨 때문에 녹지 않았다. 나는 대회사에서 준 긴팔 위에 민소매 경량패딩을 걸쳤다. 옷이 땀에 젖었지만 딱 적당했다. 이 추위에도 민소매와 반바지만 입고 달리는 이들이 많았다. 복장만 봐도 고수의 기품이 풍긴다. 복장에 정답은 없다. 다만 겨울 러닝에서 분명한 원칙은 있다. 두껍고 무거운 옷은 피할 것, 통기성이 좋은 옷을 여러 겹 겹칠 것.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복장은 대회가 아니라 훈련 과정에서 여러 차례 실험을 거쳐 찾아야만 한다. 한강 산책로는 대부분 평지여서 달리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역시나 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아야 재밌는 법. 주로 일부가 눈이 녹지 않아서 눈이 쌓여 있기도 하고 어설프게 녹은 눈은 더욱 미끄러웠다. 하지만 이런 주로를 언제 뛰어보랴. 안전에 유의하면서 색다른 주로를 즐기기로 했다. 다 나와 같은 마음은 아닐 테다. 참가자들은 저마다 개인 목표가 있다. 첫 번째 참가라면 완주가 목표일 수 있겠지만 N번째 참가인 경우에는 자신만의 기록을 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을 테다. 예상치 못한 변수에 당황하고 불만을 내뱉는 참가자도 보였다. 다행히도 위험한 구간마다 진행요원들은 미끄러운 길을 미리 주의하였다. 마라톤은 정말 '자신과의 싸움'일까 마라톤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순위보다 기록이 중요하고 경쟁보다는 자신만의 페이스관리가 중요하다. 잠깐 경쟁자보다 앞서는 것보다 내 페이스를 잘 유지하여 골인 지점에 이르는 기록을 단축시키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자신과의 싸움일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난 아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건대 내 앞의 누군가를 목표 삼아 경쟁심에 불타오를 때가 많다. 예를 들면 집 주변 산책로를 뛰다 보면 나를 앞질러가는 이가 있으면 괜스레 뒤꽁무니를 쫓게 된다. 나를 앞서 가지 않더라도 저 멀리 뛰어가는 이가 있으면 추월하고자 하는 욕구가 올라올 때가 있고, 그 욕구를 따라 추월하기도 한다. 혼자만의 올림픽이랄까. 참으로 미성숙한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낯 부끄러운 순간이다. 대회에서 그 경쟁심과 미성숙함은 증폭된다. 혼자 달릴 때는 페이스를 잘 유지하며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편이지만, 대회에서 달리다 보면 경쟁심이 부추겨지면서 페이스는 쉽게 무너진다. 혼자 달릴 때와 다르게 마라톤 대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에너지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함께 달리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달리는 사람들이 지면을 딛는 발자국 소리는 흡사 말발굽소리 같기도 하다. 동서남북으로 들리는 마라토너 발자국 소리는 내 마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