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밑이다. 세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새해맞이 생각에 손길이 바빠졌다.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하다가, 서랍 깊은 곳에서 낡은 가계부 한 권을 발견했다. 힘찬 필체가 또렷하다. 아버지를 만난 듯 금세 눈이 뜨끈해진다. 그날의 기록, 아버지의 삶 아버지의 가계부를 조심스레 펼쳐본다. 명필, 흘림체 글씨가 가득하다. 그날의 풍경이 눈앞에 다가온다. 1981년 1월 25일, 장수 장날이다. 엄마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서둘러 농사지은 쌀을 포대에 담는다. 장수 특유의 매서운 추위를 뚫고 읍내 장터로 향하신다. 귀한 쌀을 현금화하여 여기저기 둘러보며 찬거리 등을 사신다. 그득한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돌아와, 방에 펼쳐 놓으며 물건 값을 읊으신다. "닭 한 마리 2000원, 꼬막 500원, 미역 150원, 만수향 50원, 소금통 150원...." "너그 아부지는 왜 저런다냐" 엄마는 아버지의 꼼꼼한 가계부 정리를 못마땅해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록을 멈추지 않으셨다. 중절모가 잘 어울렸던 우리 아버지는 절약 정신이 투철한 분이셨다. "함부로 쓰지 말아라. 꼭 필요한 데에만 써라." 늘 강조하시던 아버지는 빈방에 불이라도 켜져 있으면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자식들이 쓰다 만 몽당연필을 모아 고무줄로 묶어 서랍 한편에 두셨고, 웬만한 생활 도구 정도는 낡은 물건을 재활용해 뚝딱 만들어 사용하셨다. 아끼고 오래 쓰는 삶은 7남매를 키워내신 비결이자, 물건에 깃든 의미를 귀히 여기는 당신만의 생활 방식이었으리라. 이제 와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시대를 앞서가는 환경운동가이셨다. 그런데 나의 삶은?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