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의 바다는 낮에는 에메랄드빛 평화를 선물하지만, 해가 질 녘이면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진정한 여행의 묘미는 그 화려한 불빛 뒤편, 끈적한 삶의 냄새가 진동하는 현지인의 삶의 현장인 시장 구경에 있습니다. 화려한 휴양지 이면에 생동하는 삶의 터전 코타키나발루에는 재래시장인 '필리피노 마켓'이 있습니다. 이곳 시장은 단순히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닙니다. 1970년대 필리핀 내전을 피해 건너온 이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일궈낸 삶의 터전입니다. 그들은 낯선 땅 코타키나발루의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고향의 맛과 현지의 재료를 섞어 이 거대한 야시장을 만들어냈습니다. 시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우리는 마치 다른 차원의 문을 열고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집니다. 현대적인 쇼핑몰의 에어컨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습기를 머금은 후끈한 열기와 비릿한 바다 내음, 그리고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온몸을 휘감습니다. 정돈된 도시의 규칙은 여기서는 무력해집니다. 무질서해 보이는 이 공간을 지탱하는 것은 오직 생존을 향한 치열함과 손님을 부르는 활기찬 외침입니다. 상인들의 마디 굵은 손, 쉼 없이 움직이는 무심한 칼날 그리고 그 사이를 누비는 여행자들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이 뒤섞여 필리피노 마켓만의 독특한 아우라를 만들어냅니다. 낯선 단맛에 녹아드는 경계: 소년의 미소가 깃든 과일 천국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다양한 열대 과일의 향연입니다. '과일 천국'이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할 만큼, 시장 초입에는 찬란한 빛깔의 과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노란 빛깔의 망고는 금방이라도 과즙을 터뜨릴 듯 팽팽하고, 짙은 보라색의 망고스틴은 단단한 껍질 속에 하얀 속살을 감춘 채 주인을 기다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귀한 몸값을 자랑하며 백화점 쇼케이스에나 앉아있을 람부탄과 망고가 이곳에서는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 저렴한 가격에 팔려 나갑니다. "티킴(Tikim, 맛보세요)!" 어느 상인이 건네는 짧은 권유에 못 이기는 척 멈춰 섭니다. 그가 건넨 이름 모를 열대 과일 한 조각을 입에 넣자, 끈적한 단맛 뒤에 숨어있는 강렬한 풍미가 나쁘지 않습니다. 제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굿(Good)!"을 외치자 주인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앳된 소년이 큰 공만 한 두리안을 능숙하게 다루고 있어 발길을 멈췄습니다. 소년은 학교가 끝나면 형을 도와 이곳 가게에서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거 맛있는 두리안이에요."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