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교회를 떠난 친구가 있다. 존재 자체로 번뜩이는 고등학생 때였다. 내가 속한 세계는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 준비로 바빴다. 한 명이라도 그 축제에 더 데리고 오는 것에 혈안이 되었다. 그때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 이상으로 옳은 일이란 없었다. 소질이 있었나 무려 8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데 성공했다. 당시 교회를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는 기다란 장의자였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토록 밀착해서 앉았던 것일까 싶다. 3명이 앉으면 적절한 거리가 나오고, 4명은 조금의 여백의 미가, 5명은 과분했던. 8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앞에 5명, 뒤에 나 포함 4명, 이렇게 장의자 두 개를 가득 채웠을 때의 뿌듯함은 치기 어린 마음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당시 나도 그렇고 내가 속해 있던 교회는 보수적이고, 근본적이었다. 성경의 맥락보다는 문자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본질 자체보다는 본질적이라는 형용사 혹은 구호에 집착했다. 부르짖던 거룩이라 하는 것은 모 아니면 도여서 얼마나 날이 서 있었는지 모른다. 한참 성탄 행사가 무르익을 무렵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어떤 말을 시작했다. 성탄의 주인은 산타가 아니고 예수님이라는 맥락이었다. 설교 순서도 아니었으며, 기도회도 아니었는데, 산타에 대한 비판은 15분 이상 이어졌다. 참고로 사회자는 고등부 총무이자, 담임목사님의 아들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예나 지금이나 빛을 증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란 어둠을 명시하는 일이었다. 딱히 큰 어둠이 아니어도, 어쩌면 그게 진짜 어둠이 아니어도, 뭐든 어둠으로 상징하는 순간 빛은 더 우렁차졌다. 그때는 그 말들에 동조했다. 틀린 말이 아니지 않는가. 성탄이라는 말 자체가 가르치듯 산타가 주인공인 양 사람들이 믿어 재끼는 것은 분명 잘못된 행보였다. 성탄의 의미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지는 것이 옳았다. 찬물을 끼얹은 건지, 활활 타는 불을 던진 건지 헷갈리는 상태로 행사는 마무리되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돌아가면서 "너네 교회 참 특별하다"는 여론을 보였다. 그건 칭찬 이상의 것으로 해석되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