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혀버린 고된 노동, 사라진 성벽에서 얻은 위로

지난 12월 중순, 경남 사천만의 바닷가. 선진리에 비교적 온전한 왜성 하나가 남아 있다. 이 왜성에서 기나긴 임진왜란 7년의 막을 내린 전쟁이 촉발되었다. 다이고의 꽃놀이 후 히데요시가 죽는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지지만,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四路竝進)으로 왜군을 압박한다. 특히 이순신과 진린이 남해안의 왜성들을 견제하며 순천왜성에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1598년 11월, 사천왜성의 시마즈에게 순천 쪽에서 한 척의 왜선이 어둠을 타고 닿는다. 바닷길을 건너온 것은, 궁지에 몰린 고니시의 울음 같은 구원 요청이었다. 향불처럼 타오른 불길 시마즈는 망설인다. 군사는 지쳐있고, 철수할 바닷길도 여의치 못하다. 하지만 순천이 무너지면 사천 앞바다도 막히고, 부산으로 이어지는 퇴로는 이순신에게 완전히 장악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남해안은 조명연합군의 바다가 된다. 시마즈는 더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남은 병선과 고니시의 사위 등 장수들을 불러 전쟁에 나선다. 그 달 19일 새벽, 노량 바다가 환하게 밝혀진다. 치솟는 불길과 연기가, 긴 전쟁에 목숨을 앗긴 조선군을 추모하는 향불처럼 타오른다. 시마즈 함대가 돌파를 시도하자, 조명연합군의 포문이 불을 뿜는다. 바다가 요동치고, 불길이 하늘마저 태웠다. 노량에서 쫓긴 시마즈 함대는 남해 관음포에 갇혀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수백 척 중 겨우 50여 척만이 곳곳이 부서진 채 도망친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뒤꽁무니에서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간교한 고니시는 그 새벽, 순천왜성에서 그저 불길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 생쥐처럼 바다로 줄행랑을 놓는다. 이순신은 전투 중 전사했지만, 일본 역시 내란의 혼돈에 휩싸인다. 사천왜성은 그날 이후 버려졌다. 긴 전쟁의 마지막 불길이 이곳 사천 앞바다에서 시발하였다. 진린을 설득해 노량으로 나간 이순신의 결단이 터뜨린 마지막 포성이었다. 그 포성이 마침내 긴 7년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는 오직 백성을 향한 충정이었다. 자라가 잠든 침오정 400여 미터 남짓의 사천읍성엔 임진왜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았다. 이곳은 또한 별주부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별주부전은 단순한 이야기다. 그 성곽 곁, 자라가 잠들었다는 자리에 정자 침오정이 오롯하다. 병을 얻은 용왕이 약에 쓰려고, 토끼 간을 구해오라며 자라를 육지로 보낸다. 자라가 토끼를 꾀어 용궁에 데려오나 토끼는 이내 꾀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야기엔 해학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권력의 상징인 용왕,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토끼, 느리지만 묵직한 자라의 지혜가 서로 어우러진다. 이야기에서 우리는 삶의 무게와 웃음의 여유를 동시에 맛본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