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경보가 발생했습니다' 밤 11시, 퇴근 중 버스에서 꾸벅 졸다 눈이 번쩍 떠졌다. 지진이라고? 폰의 알림에는 분명 '지진 경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다급히 터치하니, 국내 앱이 아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세이프티 팁'(safety tip)이라는 일본 앱이 보내는 메시지다. 일본 여행자에게 이 앱은 지진, 기상, 분화, 열사병 등 안전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알려준다. 종종 보던 일본 거주 한국인 유투버 소개로 별생각 없이 설치했는데, 마침 삿포로 지역에 경보가 뜬 것이다. 여러 고민 끝에 결정한 여행인데. 제발 더 이상 나쁜 뉴스가 들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 붉은 별에 가려진 아이누족의 눈물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향미, 서슬 퍼런 칼날처럼 지켜지는 품질, 역사와 지역을 보여주는 라벨, 일본 맥주에서는 특유의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이런 일본 맥주를 향한 나의 감정은 복잡하다. 분하지만 부러운, 양가적 감정은 일본 맥주를 마시는 나를 괴롭게 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홋카이도의 삿포로 맥주 공장을 방문해서 이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홋카이도의 도청소재지, 삿포로. 이곳은 일본 맥주의 영혼이자 심장이다. 1876년 메이지 정부는 삿포로에 최초의 맥주 공장을 짓기로 결정한다. 본래 후보지는 도쿄였으나 이 결정을 뒤집고 삿포로를 낙점한 인물은 무라하시 히사나리, 영국 유학으로 근대 산업을 경험한 무사 출신 관료였다. 그는 보리와 홉 재배에 적합한 날씨, 깨끗하고 풍부한 물 그리고 천연 얼음을 가진 홋카이도가 맥주 양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의 영향력이 뒤에 있었다. 1868년 이전 홋카이도는 완전한 일본의 영토가 아니었다. 이곳의 주인은 원래 아이누족이라는 원주민이었다. 본토 일본인들과 생김새도 언어도 완전히 달랐고 사슴 사냥과 낚시로 살아가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터전은 1858년 미국이 에도 막부에게 개항을 요구하며 파괴되었다. 홋카이도는 군사적으로 러시아 남하를 막아줄 수 있는 완충지대였다. 미국은 이곳을 거점으로 북태평양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애초에 미국은 에도 막부가 홋카이도를 식민화하기 바랐지만 실패했다. 1868년 에도 막부를 무너뜨린 군부는 서양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그리고 미국의 원조 하에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1869년 메이지 정부 설립한 개발청, '삿포로 개척사'가 있었다. 이들에게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아이누족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아이누족의 언어와 사냥을 금지하고 농업을 권장하는 동시에 그들의 땅을 국유화했다.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였지만 실제로는 학살에 가까운 정책이었다. 환경 변화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던 아이누족은 자연감소라고는 보기 어려울 만큼 급작스레 사라져 갔다. 메이지 정부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 10년에 걸쳐 삿포로를 근대 도시로 일구었다. 미국은 농업과 건설 기술을 전수했다. 바둑판 도로를 가진 계획도시 삿포로는 본토 다른 도시의 모델이 되었다. 맥주 양조장은 이런 근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개척사 맥주에서 삿포로 맥주로 삿포로에 '개척사 양조장'을 설립한 무라하시 히사나리는 독일에서 맥주 양조를 배운 나카사와 세이베이를 브루 마스터로 선임했다. 그는 독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876년 첫 라거 맥주를 선보였다. '개척사 맥주', 이 맥주가 일본의 시작이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