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에게 변호사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라며 "오히려 해로운 존재였는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29세 때인 1975년에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2년 뒤 판사가 됐다가 1978년에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한 그는 훗날 이 책을 통해 자기 자신도 그런 변호사였다고 고백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큰 틀에서 보면 나는 적당히 돈을 밝히고 인생을 즐기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라고 털어놨다. 1979년에 마산과 부산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무고한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가고 시위 부상자들이 병원 응급실 입구에서 거부를 당할 때도 "나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런데 그는 "나는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라고 하지 않고, "큰 틀에서 보면"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며 여지를 남겼다. 그는 "갈대처럼 살라"는 어머니의 조언들이 어려서부터 "지독히도 싫었다"라며, 변호사 개업 초기에도 마음속으로는 법조계 부조리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절의 그는 '작은 틀에서 보면' 양심적인 변호사였다. 부림사건 변호인이 된 노무현 그런 노무현의 양심을 자극해 새로 거듭나게 만든 것이 전두환 정권 초기의 대표적 조작 사건 중 하나인 부림사건이다. "내 운명을 바꾸었던 그 사건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판사로 변호사로 사는 동안 애써 억눌러 왔던 내면의 소리를 진지하게 듣게 되었다"라고 <운명이다>는 말한다. 부산시가 발행한 <부산민주운동사>는 "부림사건은 1981년 9월 부산 지역에서 민주인사를 대대적으로 검거한 사건"이라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이 사건은 10·16 부마민주항쟁으로 구속된 후 석방된 사람들과 이후 1980년과 1981년 부산대에서 있은 시위 사건의 배후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의 전민노련과 전민학련과 연관지어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전두환정권 초기의 저항세력에 대한 전국적인 일제 검거 사건이었으며 정권 초기의 불안정 요인에 대한 사전정리 작업이었다." '부산 학림'의 줄임말인 부림(釜林)은 조선시대 사림파를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15~16세기에는 개혁적 선비들이 사림(士林)으로 불렸다. 이와 비슷하게 공안기관이 운동권 학생들을 학림으로 부른 시절이 있다. <항도부산> 2020년 제40호에 실린 정승안 동명대 교수의 논문 '1980년대 한국의 학생운동과 부림사건의 현재적 의미'는 학림과 부림이라는 용어의 출현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전민학련이라는 대학생 단체가 첫 모임을 (서울) 대학로에 있던 학림다방에서 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 말로, 경찰이 숲처럼 무성한 학생운동조직을 지칭해서 붙였던 명칭이다. 이 학림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발단이 되어 부림사건이 시작된다." 이 사건으로 끌려간 22명은 부산의 노동자·학생·교사들이다. <운명이다>에는 그중 일부인 "이호철·장상훈·송병곤·김재규·노재열·이상록·고호석·송세경·설동일"이 거명돼 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