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에게. 네 아버지가 우셨다. 1년 전 너를 떠나보낼 때도 보지 못했던 모습인데, 네 단골 세탁소 이야기를 하시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성호 보내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길을 걷다 성호가 다녔던 세탁소가 보이더라고. 언젠가 밥 먹고 오다 '아버지, 잠깐 세탁소 좀 들렀다 갑시다' 했던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래서 무작정 세탁소에 들러 '김성호 아버지입니다' 했지. 주인 아주머니가 '아이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청년인데 왜 안 옵니까'라며 찾아갈 옷을 주더라고. 그래서 말씀드렸지. 이번 참사로 그렇게 됐다고. 아주머니가 나를 부여잡고 펑펑 우셔. '그렇게 인사성 좋은 착한 청년이 없었다'면서." 네 정장과 와이셔츠 한아름을 어깨에 지고 오던 그날을, 아버지는 "가장 마음 아팠던 날"이면서도 "위안이 됐던 날"로 기억하신다. 널 위해 눈물 흘려주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감사함 때문에, 그리고 '아들놈 헛살진 않았네'라는 생각에. 어머니는 오늘도 옷장을 연다 사람 하나하나가 우주라더니, 네가 깃든 곳곳에서 잠자고 있던 기억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박지성 영상이 뜰 때면, 고3 때 등교하자마자 흥분하던 네 모습이 떠오른다. "중한아, 박지성이 맨유(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엘 갔어야! 맨유여, 맨유!" 네 누님의 카카오톡 프로필은 여전히 네 사진과 "울집베컴♥"이란 문구로 채워져 있다. 그래, 우리 참 맨유와 베컴을 좋아했었지. 엊그제도 네 방에 손흥민 사진이 놓여 있는 걸 보고 "슛돌이답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요새도 너를 "슛돌이"라고 불렀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종종 네 이야기를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다시 고3 때로 돌아가 네 목소리를 떠올린다. "내가 살다가 한국인이 맨유에 가는 걸 보다니!" 이놈아, 앞으로 살면서 봐야 할 것이 얼마나 더 많은데 뭣이 급하다고 갔냐. 너희 집 안방엔 아직 네 옷이 촘촘히 걸려 있다. 어머니는 이따금 옷장을 열어 옷 냄새, 아니 네 냄새를 맡으신다. "지옥 같은 세월"을, "살을 갈기갈기 찢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옷에 깃든 네 냄새로 달래신다. 반찬을 만들다가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다가도 어머니는 너를 떠올리신다. 어머니의 시공간이 너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네 가족의 삶을 전달할 마땅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어머니께선 "죽은 채 사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다. "죽은 채 산다"는 모순이, 말이 안 되는 이 말이 지금 네 가족의 일상이 되고 말았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인지, 눈을 뜨고 있어도 뜨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어. 내가 차라리 독종이었다면, 악녀로 태어났다면 조금은 덜했을까. 차라리 그런 인간이었다면 이 고통을 감당했을 텐데. 시간이 지난다고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 더 아프고, 그 아픔이 더 깊어져." 어머니의 이 말을 듣고, 시간이 약이라는 그 망각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김성호'라는 고유명사를, 그리고 네 가족의 삶을 그저 기록하기로 했다. 기록은 망각의 적이자 기억의 단초이고, 기억은 진실을 향한 동력이므로. 나아가 우리가 진실에 다가갔을 때, 그래서 네 가족을 비롯한 많은 유가족이 '이제 됐다'고 생각할 즈음에야 시간은 약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네 부모님이 나를 아들의 친구가 아닌 기자로 만난 까닭도, 이 편지를 모든 사람이 보도록 용기를 내신 이유도 이 때문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