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중개만 3만 통, 사할린 동포 세상으로 불러낸 박노학

지난 18일 강원도 동해항 국제여객터미널을 통해 사할린 동포 82명이 모국에 발을 디뎠다. 2025년 영주귀국 대상으로 선정된 234명 가운데 첫 번째 입국자들이었다. 김경협 재외동포청장과 허정구 대한적십자사 사할린동포지원본부장이 반갑게 맞으며 고령자들이 탄 휠체어를 밀었다. 눈물과 한숨으로 점철된 한민족 디아스포라 역사 가운데서도 사할린 동포는 가장 혹독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 말 고된 노역에 신음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나 일본과 소련은 물론 남북한마저 철저히 외면해 국적이 최대 7차례나 바뀌는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 했다. 80여 년 만에 고국 땅을 밟는 이들은 한 사람 이름을 떠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되새겼다. '가라후토 억류 귀환 한국인회' 초대 회장 박노학이었다. 가라후토(樺太·화태)는 사할린을 일컫는 일본어다. 그가 없었다면 사할린 한인의 존재는 더 오랫동안 잊히고, 모국 귀환은 한참 늦어졌을 것이다. 소련-일본-한국을 이어준 개인 우체국 박노학은 1912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발관에서 일하다가 "한 집안에 남자 둘이면 한 사람은 징용을 가야 하니 어차피 갈 거면 빨리 가는 게 낫다"는 친구 권유를 받고 가라후토인조석유주식회사 노무자 선발에 응모했다. 고향에 세 자녀를 남겨둔 채 1943년 12월 사할린으로 떠나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 탄광에서 일했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조약에 따라 영유권이 러시아로 넘어간 사할린은 러일전쟁 직후 일본이 북위 50도선 이남을 차지해 둘로 갈렸다가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소련으로 귀속됐다. 일본은 사할린 남부에 거주하던 자국민 대부분을 귀환시키면서도 조선인 4만 3000여 명은 제외했다. 박노학을 비롯한 사할린 한인들은 무국적자로 방치되다가 소련과 북한 국적 중 하나를 고르라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사할린 동포는 거의 남한 출신이었다. 소련이나 북한 국적을 얻으면 고향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질 까 우려해 버티다가 취업이나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소련 국적을 택했다. 일부는 북한 국적을 얻어 북한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1956년 일본과 소련이 국교를 맺으면서 잔류 일본인과 배우자의 귀환이 추진됐다. 1947년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던 박노학도 1958년 1월 일본으로 송환됐다. 그는 코르사코프항에 배웅하러 나온 동포들이 "한일 양국 정부에 우리 이야기를 꼭 전해 달라"라고 애원하던 목소리와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배 안에서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데 몸을 바치겠다고 다짐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썼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탄원서를 도쿄의 주일한국대표부에 전달한 뒤 2월 6일 이희팔, 심계섭 등 사할린 출신 한인 50여 명을 규합해 단체를 조직했다. 일본과 소련 정부, 유엔에도 동포들의 억울한 처지를 알리고 모국 귀환을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