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은 한국 역사상 불교가 가장 심하게 탄압받는 시대였다. 조선조는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철저하제 배불책으로 일관하였다. 불법은 사태(沙汰)를 당하고 승려는 천대를 받았다. 법난이 계속되었으며 도성에서 쫓겨 산중 불교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창업 이전부터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그는 태고(太古)와 나옹(懶翁) 등 고승을 사사하고 특히 무학대사와 자초(自超) 대사와는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왕조 창업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위화도회군 때에는 승장인 신조(神照)의 도움을 입었고, 등극 후에는 무학을 왕사(王師)로 삼아 건국 사업을 지도받았다. 그럼에도 조선왕조는 척불책으로 일관하였다. 고려 말기 불교의 폐악이 극에 달해 이반된 민심을 새 왕조로 돌리기 위해 숭유척불책을 쓴 것이다. 특히 조선조의 이념적 기틀을 마련한 정도전과 같은 극렬한 척불주의자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숭유억불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3대 태종 때부터이며, 태종에 이어 세종 그리고 연산군 때 절정에 이르렀다. 태종은 즉위와 함께 과감한 척불책에 나서 '척불 7대책'을 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사원의 수를 줄이고 승려를 환속시킬 것. ② 사원 소유 토지를 국유로 몰수할 것. ③ 사원 노비를 거두어 군정(軍丁)에 충당할 것. ④ 도첩제(度牒制)를 엄하게 할 것. ⑤ 종파를 11종에서 7종으로 병합할 것. ⑥ 왕사-국사(國寺)를 폐지할 것. ⑦ 능사(陵寺)의 제도를 폐지할 것 등이다. 태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세종은 흔히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힌다. 그럼에도 불교에 대해서는 지독한 편견으로 가혹한 억불정책을 단행하였다. 세종은 ① 사사(寺社)의 노비와 승려들이 상전(相傳 : 대대로 이어짐)하는 법손(法孫)의 노비를 속공(屬公 : 관부의 소유로 넘김)할 것. ② 7종을 선(禪)·교(敎) 양종으로 폐합할 것. ③ 사원수를 대폭 줄일 것. ④ 내불당을 폐합할 것. ⑤ 도성 내에는 홍천사와 흥덕사만을 남기고 나머지 사원은 전부 철폐할 것. ⑥ 철폐된 절의 불상과 종을 녹여서 병기로 만들 것. ⑦ 불사의 실행을 줄여서 비용을 절약할 것. ⑧ 승도들이 함부로 도성 내에 출입하는 것을 금할 것. ⑨ 도첩제를 엄하게 하고 특히 연소자의 출가를 금할 것 등을 시행하였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고 수많은 충신을 죽이고 등극한 '업보'를 씻기 위해서였는지 불교에 비교적 관대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은 예종과 성종대에는 다시 척불책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새로 승려가 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금지하고 기존 승려들에게도 환속하도록 강요하였다. 조선시대 가장 혹독한 불교 탄압을 한 임금은 연산군이다. 선·교 양종과 승과제도를 폐지하고, 사원이 소유하는 모든 농토를 몰수하였다. 삼각산에 있는 모든 사원에서 승려들을 몰아내고 원각사를 폐사한 자리에 기생들을 관장하는 장낙원을 만들었다. 또 비구니들이 거처하는 절을 헐고 이들을 노비로 삼기도 했다. 연산군은 척불책뿐만 아니라 유교에 대해서도 탄압하였다. 성균관을 철폐하여 유연지로 만들고 여기에 모셨던 공자상을 고산암 태평관으로 옮겼다. 연산군의 폐악은 척불이나 척유라기 보다는 폭군에 의한 광란의 행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