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녀를 찾았다. 브라보! 참으로 오랜 마음속 멍울이자 숙제였다. 19년간 연락이 두절된 그녀를 찾아내는 일.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다시 연결된 것은 지난 10월 하순, 올레축제 며칠 전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천장까지 폴짝 뛸 만큼 흥분했다. 지독한 독감으로 목소리까지 잠긴 상황에서도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그녀를 찾아낸 뒤로 또 다른 숙제가 생겼다. 이 소식을 내 책 <놀멍 쉬멍 걸으멍> 독자들과 그녀를 아는 올레꾼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 감기 기운에 미뤄두다가, 올해가 가기 전에 노트북을 펼쳤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해 보련다. # 너무나 죽이 맞았던 산티아고 길동무, 헤니와 나 눈치 빠른 올레꾼이라면 내가 찾은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했을 것이다. 그렇다.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각자 길을 내자며 나를 부추겼던 '영국 여자 헤니'다. 우리가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만난 일은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운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 여정 중 가장 혹독하고 무서운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이었다. 노을 질 무렵 알베르게가 있는 마을에 겨우 도착했지만 침대는 이미 다 찼다. 헛간이라도, 어디서든 재워달라 했지만 거절. "2km만 더 가면 다른 알베르게가 있다"는 말이 유일한 친절이었다. 한 발도 떼기 힘든데 2km라니.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지만 겨우 발길을 떼어놓았다. 오르막 산길 같은 곳으로 접어들면서 날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때 멀리서 무언가가 달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덩치 큰 개가 한 마리도 아닌 서너 마리였다. 개들의 공격을 자극하면 어쩌나 겁이 나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한국말로 외쳤다. "누가 저 개들 좀 잡아달라고요!" 하늘은 무심하지 않았다. 고갯마루에 나타난 누군가가 휘파람을 불자 개들은 그에게 달려갔다. 알고 보니 그는 알베르게 운영자였고 개들은 그의 식구였다. 원망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침대를 배정받자 그제야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산중 알베르게라 거의 나 혼자였다. 마을 이름은 카사노바. 잊을 수 없는 이름! # 카사노바 카페에서 만나 멜리데에서 뿔뽀를 먹다 다음날 새벽, 전날 저녁도 못 먹고 잠든 터라 배가 고팠다. 동네 카페에 아침을 먹으러 들어갔다. 카페의 아침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한 끼를 굶은 뒤 먹게 된 스페인식 계란 감자 오믈렛의 맛과 카페 콘 라체(스페인식 밀크커피)의 맛은 황홀할 정도였다. 내가 너무 행복해 보여서였을까.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가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바로 헤니였다. 헤니는 영국에서 왔고 오늘로 32일째 걷는다고 했다. 나는 33일째. 하루 차이로 시작한 우리가 카사노바에서 속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고 그녀가 먼저 떠났다. "부엔 까미노!" 길 위의 만남과 헤어짐은 늘 쿨하다. 그런데 얼마 못 가 길가 큰 나무 그늘 아래 늘어지게 쉬는 여자가 보였다. 헤니였다. 그 모습을 보자 숙제하듯 걷는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도 옆에 철퍼덕 앉아 한참을 멍 때렸다. 그리고 수다를 나누던 끝에 우리 둘 다 다음 마을 멜리데에서 뿔뽀를 먹고 싶다는 소망이 같다는 걸 확인했다. 헤니는 맛집 정보도 갖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가기로 했다. 뿔뽀는 기대 이상이었다. 토속 맛집 분위기 속 올리브오일과 스페인식 고추로 맛을 낸 문어는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물 대신 선택 가능한 '비노 블랑코(화이트 와인)'를 곁들여서 우리는 한껏 여유로워져서 산티아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왜 직장을 그만뒀는지, 무엇을 버리고 얻었는지, 좋았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