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때로 익숙한 상식을 뒤집는다. 피해를 말하는 쪽은 약자이고, 책임을 져야 할 쪽은 강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최근 국제정치와 국내 정치에서는 전혀 다른 장면이 반복된다. 이미 권력을 가진 집단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부르고, 세계 최강대국의 지도자가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이 장면은 단순한 언어의 선택이 아니라, 오늘의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바꾸는 중요한 신호다. 정치가 '힘의 언어'에서 '피해의 언어'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있다. 그는 대통령 시절 내내 "미국이 불공정하게 당하고 있다", "우리가 빼앗기고 있다"는 메시지를 반복했다. 특히 백인 유권자를 향해 "이제 백인이 차별받는다"는 감정을 자극하며 지지를 조직했다. 실제 조사 결과도 이를 보여 준다. 퓨리서치센터가 지난 3월 미국 성인 4000여 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확인된다. 이 조사에서 공화당 성향 응답자의 약 55%가 "백인이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는다"고 답했으며, 민주당 성향 응답자는 약 21%만이 같은 의견에 동의했다. 전체 백인 응답자 중에서도 약 45%가 백인이 차별받는다고 느낀다고 답한 점은, 실제 사회적 권력 위치와는 별개로, 백인 집단의 피해 인식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정서적 자원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사회의 정치·경제·문화 권력이 여전히 주로 백인 남성에게 집중되어 있음에도, '밀려난다'는 감정이 정치적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과거에는 '백인의 우월'을 말하던 정치가 이제는 '백인의 피해'를 말하는 정치로 옷을 갈아입었다. 노골적인 우월주의 대신, 억울함과 상실감을 내세우는 새로운 정치 전략이 등장한 것이다. 중심이었던 집단이 스스로를 새로운 약자로 선언하는 이 장면이 만들어내는 감정적 효과가 오늘의 미국 정치를 움직이고 있다. 미국 극우가 만들어 온 '백인 피해'의 상징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무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최근 미국 우익 담론에서 남아공은 다시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남아공에서 백인 농민이 조직적으로 살해되고 있다", "백인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트럼프 역시 이를 직접 언급하며 남아공 정부를 비난한 바 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