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25년 끝자락이다. 해가 저무는 시기에는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생각은 '내년에는', '내년에도'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한 해의 끝자락에 이르면 새 수첩을 준비한다. 수첩은 '일기장'이기도 하고 '메모지'이기도 하며 '독서기록장'이기도 하다. 어느 해에는 쪽수를 다 채우기도 하고, 어떤 해에는 뒷장이 제법 남기도 한다. 한 해가 그렇게 끝났으니 남은 쪽수도 그 해의 일이라 다음 해에 이어 쓰는 일은 없다. 새 수첩을 준비하는 것이 내가 새해를 맞이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의식이다(2026년 수첩은 따로 살 필요가 없어졌다. 9월 어느 날, 하얀 바탕의 단정한 오마이뉴스 '10만인 클럽' 기념 수첩이 날아들었다). 저물어가는 해를 보내는 방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첩 맨 첫장부터 뒤적이며 '이때 이런 생각을 했구나', '이런 일이 있었지' 하며 저무는 해와 이별한다. 2025년 수첩에는 나의 생각, 일, 독서, 만남, 여행, 음식, 걱정, 감사 등이 때로는 정갈한 서체로 때로는 날림체로, 포스트잇에 써서 붙이기도 하고 별표로 강조하기도 하며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람들이 새 수첩과 만날 때처럼 나의 방식도 다르지 않다. 수첩 겉표지를 열어 바로 맨 앞장 오른쪽 지면에 제목을 쓴다. 제목은 단순하다. '2025년의 기록' 이런 식이다. 그 다음 첫장에는 한 해를 살아가며 나를 지탱하고, 일으키고, 돌보고, 유념할 몇 개의 문장을 여백을 고려하여 쓴다. 그 다음 장은 한 해를 살면서 새롭게 만나게 될 문장 중에서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록하기 위해 비워둔다. 그러니까 세 번째 지면부터 1월 1일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맨 앞 장을 채우는 문장 몇 개가 한결같다. 아무래도 오십 고개 중턱에 서면 사람마다 나름의 삶의 지향, 태도, 가치관의 윤곽이 점점 또렷해지니 인지상정인 듯하다. 매일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수첩을 열며, 그 문장들에 눈이 머물고, 마음이 깃들고, 그리하여 자신을 돌보며, 살아갈 힘과 양식을 얻는다. 모든 것의 바탕, '사랑이 살린다' 하루를 시작하든, 한 해를 시작하든 가장 먼저 스스로에게 건네는 문장은 짧지만 내 삶 전체를 관통하고 아우르는 '사랑이 살린다'이다. 나는 교사이다. 그것도 초등학교 교사. 아이들은 참으로 신기하고 나를 웃게 하고 신통방통한 '보물상자'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조잘대고 뛰고 보채고 요구할 땐 정신이 하나도 없고 탈진되기도 한다. 하루 하루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스스로 좌절할 수 있다. 되돌아보면 그때부터 나는 '사랑이 살린다'고 수첩에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출근길 운전 중에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고 걱정이 밀려오면 "나는 내가 가진 사랑을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학교에 간다" 하고, 입 밖으로 내뱉으며 스스로를 세뇌시키곤 했다. 그리고 그것은 관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바탕 둔다면, 어떤 문제든 결국 해결된다고 믿는다. 사랑했다면 책임을 다했다는 뜻이고 후회는 적다고 믿는다. 아줌마는 오직 사랑뿐인 커다란 통 같았다. - <그리운 메이 아줌마> 중에서 "리벤 벨렙트", 사랑이 살린다. - <괴테 할머니의 인생 수업> 중에서 책 <그리운 메이 아줌마>에서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여섯 살 '서머'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던 친척집을 전전하다 '오직 사랑뿐인 커다란 통 같은' 메이 아줌마를 만나 따뜻한 가족의 사랑을 느끼며 자랄 수 있었다. 메이 아줌마가 준 6년 간의 크고 깊은 사랑의 힘으로 '서머'는 아줌마가 하늘나라로 간 이후 삶의 의욕을 잃고 힘들어하는 아저씨를 돌보는 강인한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사랑이 살린다.' 사람이든 일이든,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결국 '사랑'이었다. 그러니, 모든 해, 모든 날에, '사랑'을 바탕에 깔고자 유념하고 또 유념하고 싶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