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겨울 밭에 시선을 던지면, '비움', '응축', '수렴'과 같은 낱말이 떠오른다. 밤 동안 꽁꽁 얼었다 낮 동안 녹기를 반복하며, 흙은 겨울 동안 그렇게 숨을 쉰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숱한 풀들과 미생물들을 품고 있을 테다. 고요하지만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힘을 모으고 있을지 모른다. 제 모습으로 자기답게 깨어날 때를 기다리며 인내의 시간을 살아내야 할 시기가 있는 법이다.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감나무를 비롯한 과실수가 참으로 빈약해 보인다. 그토록 무성하던 잎, 가지가 휘어지도록 달렸던 열매들이 '있기나 했냐'는 듯 무심하다. 지난 계절, 나무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초연하다. 그 계절을 그렇게 살았고, 이 계절은 또 이렇게 살 뿐이다. 외투를 걸치고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고 서도 추위가 느껴지는 겨울, 빈 뜰과 나무들을 보노라면 '사람의 삶'이 겹쳐진다. 춥다고 방 안에만 있을 일은 아니다. 시골에 오면 그렇게 된다. 밭이 눈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으면 밖으로 나가게 된다. 마른 풀들이 쓰러져 있는 빈뜰이라도 걷게 된다. 장화 신은 발 아래로 겨울 흙을 감촉하고 과실수 사이를 걸으며 나무들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감나무 사이 사이 빈 땅엔 무엇을 심어볼까, 비어두는 것이 좋을까 생각한다. 봄을 기대하며 상상하다가 잡초로부터 자유로운 이 겨울이 '호시절'인가 싶다가, 나도 충분히 응축하고 수렴하리라 생각한다. 몸을 움직인만큼 정직하게 가시화되는 땅을 밟고 흙은 만지는 일이 참으로 신기하다. 애정하는 차를 마시고, 그날의 분위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듣는 일, 여행지에서 밀려오는 감흥과는 또 다른 '몰입감'이 놀랍다. 호모 사피엔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1만 2천년 전이라고 하니, '100년도 못 사는 개인이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영겁의 시간과 함께 인류에게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식량을 얻는 DNA가 아로새겨져 있지 않고서야' 하는 생각이 드는 거다. 흙을 만지고, 씨앗이 싹을 틔우고, 키와 몸집을 키우는 모습을 바라보고, 적당한 때에 수확하는 일이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된다는 사실이, 이 겨울에, 새록새록 신기하다. 달리거나 걷기 후 머리가 맑아지는 것, 청소 후 오히려 정신이 산뜻해지는 것과 닮은 듯 다른 충만함이 있다. 무리하지 않는 몸놀림, 움직인 만큼 정직하게 가시화되는 단순한 결과물을 바라보는 일이 묘하게 '힐링'된다. 지난 10월 말, 느루뜰에 시금치 씨앗을 뿌렸다. 너무 촘촘하게 씨를 뿌려 싹튼 후에는 보드랍고 조그만 새순을 솎아내는 것이 일거리였다. 두 달 정도 지난 지금, 시금치는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이웃에게 자랑스럽게 나눠 줄 수 있을 만큼 자랐다. 흙에 파묻혀 있는 시금치 뿌리에 칼을 쑥 찔러넣어 통통한 시금치를 골라 땄다. 나눌 이웃을 생각하며 파릇하게 잘 자란 시금치를 따고 다듬어 봉지 봉지 담았다. 겨울이지만 흙을 만지고 채소를 다듬으며 몸을 움직일 때 나는 알 수 없는 '몰입의 기쁨'을 느낀다. 몰입은 기쁨과 행복의 다른 이름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