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탄핵 오뎅탕' 만든 신촌 노점상의 '세금 내고 장사하는' 꿈

5년째 응답받지 못한 '바람' 위로 2025년 첫눈이 내려앉았다. "어서 오세요~" "계란빵 하나랑 호두과자 작은 거요." 퇴근길 손님의 주문을 받은 그의 손이 바빠졌다. 노란 반죽을 빵틀에 붓고 계란을 깨트린 뒤 소금을 톡톡 뿌렸다. 달궈진 화구 속에서 계란빵이 익어가는 동안 손은 덜그럭대는 호두과자 기계로 향했다. 노릇하게 구운 호두과자를 담고 계란빵을 얹자 '4500원치' 종이봉투가 두둑해졌다. 신촌역 4번 출구 앞 노점에서 이상옥(47)씨는 5년째 계란빵과 호두과자를 팔고 있다. (그는 이날 인터뷰를 진행하고 얼마 후 영업지역을 홍대역 인근으로 옮겼다.) 눈이 녹자 다시 뜸해진 손님을 기다리는 "어서 오세요~"가 홀로 거리를 울렸다. "이렇게 장사하는 것도 사실은 불안하죠." 반죽을 붓던 이씨가 걱정하며 말했다. 노점의 계절이 돌아왔대서 노점을 따라다니는 "불안"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계란빵이 손님을 모으는 풍경 뒤엔 수십 번 붙잡히고 쫓겨났던 이씨의 "잔인한 기억"이 생생했다. 그 기억을 갖고 이씨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국회를 찾았다. 언제 들를지 모를 손님만큼 언제 들려올지 모를 국회의 '소식'을 기다리며 이씨는 계란빵을 만들고 호두과자를 구웠다. 어느 노점상의 '22년 계란빵' "노점하고 있으면 사연이 있다고 보시면 돼요. 여유 있는 사람이 노점하고 있겠어요?" 김이 폴폴 나는 계란빵을 집으며 이씨가 말했다. '왜 노점상을 택했나' 묻기도 전에 "저도 사연이 많죠"라며 20여 년 전을 회고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내수 진작을 위해 카드 규제를 대폭 완화하던 때였다. 성인이 된 이씨도 카드를 10여 장 발급받았지만 대금을 제때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가 "철없이 흥청망청 돈을 썼다"라고 후회한 당시는 신용불량자 400만 명을 양산한 '카드 사태(2002년)' 여파가 한창이었다. 공장과 다단계, 성인오락실 등을 떠돌며 1억 원 빚을 갚던 이씨는 2003년 광주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먼저 서울로 올라간 친구에게 노점 일을 소개받았다. 그때부터 강남과 경기도 성남을 거쳐 계란빵과 호두과자를 팔았다. 신용불량 딱지로 "일반 직장"엔 들어갈 수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장사가 22년째 이어졌다. 10여 년 전 빚을 청산하고 최근엔 신촌역에서 잠시 자리를 옮겨 홍대입구역에서 계란빵과 국화빵을 팔고 있다. "너무 추워도 손님이 안 와요. 대신 오늘처럼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맞으니까, 손이 자유로우니까 많이들 포장해 가죠. 어서 오세요~" 통계에 잡힌 노점상들의 삶에도 이씨가 겹쳐 있었다. 민주노점상전국연합(민주노련)과 진보당이 실시한 '2025년 노점 운영 가구 설문조사'는 전국 노점상 914명이 놓인 현실을 비췄다. 노점을 시작한 이유는 '장애·채무 등 개인 사정으로 일반 취업 어려움(35%)'과 '사업 실패·실업(33%)'이 많았다(복수 응답). 노점 운영 기간은 '20년 이상(39%)'이 가장 많았다. 월평균 소득은 대부분 200만 원 이하(75%)였고, 주된 어려움은 '매출 감소(44%)'와 '단속(38%)'이었다. 이러한 생계형 노점상은 25~30만 명으로 추산됐다. 통계에 비하면 이씨의 수입은 괜찮은 편이었지만 편차가 급격했다. 월 300만 원에서 유지되던 수입은 '코로나19'와 '12·3 비상계엄'을 지나며 30~40% 가까이 급락했다. 더구나 계엄이 터진 이후론 장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노점을 접고 국회로 나간 이씨는 대통령 파면 때까지 '노점상으로서 할 일'을 찾았다. 다른 노점상 동료들도 힘을 보탰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