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마음이 목숨이니, 마음을 잃으면 한 생애 헛사는 것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 전북 남원을 찾았다. 혼불문학관을 병풍처럼 에두른 노적봉(568m) 능선을 따라 이어진 둘레길을 걷는 일은 단순한 산행이 아니라, 소설 <혼불>의 문장과 지형, 기억과 시간이 겹쳐지는 사색의 여정이었다. 2025년 12월 31일, 혼불문학관에서 호성암지(虎成庵址) 마애미륵불좌상을 지나고, 닭벼슬봉(556m)을 거쳐 노적봉 정상에 오르는 경로는 3.4km의 바위가 많은 숲길이었다. 혼불문학관을 출발해 순천완주고속도로를 암거로 횡단하고 문학관 갈림길을 지났다. 이 혼불문학관 둘레길에는 곳곳에 최명희 작가의 소설 <혼불』>의 내용과 관련된 지명이 붙어 있다. 소설 <혼불>의 문장을 작은 판에 짧게 써 놓아 문학적 향기가 가득한 사색하는 산책길이 됐다. '바람닫이 땅'에서 꿈을 즉각적으로 실현하려는 조급함을 경계하고, 시간과 인내 속에서 미래를 준비하라는 '땅속에 밀 씨앗들을 묻어 놓아야 한다'는 글을 읽었다. '옹구네 쉼터'를 지났다. 옹구네 수그린 고개 뒷덜미로 내려앉은 달빛이 싸르락 싸르락 소리를 냈다고 한다. 걸으며 읽는 소설 속 문장 '당골네 너른골'을 지나 호성암지에 이르렀다. 이곳에는 바위 절벽에 미륵불좌상이 새겨졌다. 정오 가까운 햇살이 미륵불 조각의 상부를 비쳐서, 하부의 그늘과 대비돼 그 밝음이 고요하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바위 절벽 아래의 옹달샘에는 맑은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전북 문화유산자료인 호성암지 마애미륵불좌상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이 불상은 거대한 바위에 새긴 마애불로 미래에 태어날 미륵부처를 묘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활짝 핀 연꽃을 두 손으로 받들고 명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은 차분한 느낌을 준다. 옷은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지만, 기다란 눈, 도톰한 코, 작은 입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새김이 얕아 조각이라기보다는 그림과 같은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호성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호성사는 어느 도승이 호랑이에게 물려간 아이를 구해주고 그 아이의 부모로부터 시주를 받아 세웠다고 한다. 이 호성암지의 마애미륵불은 연화좌대에 앉아 있다.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바위를 누군가는 운근(雲根)이라 일컬어 '구름의 뿌리'라 하였다. 구름이 몸을 이루면 바위가 되고, 바위가 몸을 풀면 구름이 된다고 했던가. 호성암지에서 올려다 보면 바위 절벽 위에 하늘이 가깝다. 이곳은 산줄기의 능선 가까운 제법 높은 지형이었다. 무성한 대나무 숲을 통과하고 한참을 힘들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오르니 '혼불 전망대 바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굽은 소나무들이 바람을 막아선 숲길은 적막했다. 동남쪽으로 40km 거리의 지리산 주 능선이 울창한 소나무 사이로 아스라히 보인다. 북쪽으로 30km 거리의 진안 마이산이 앞을 가린 산줄기 위로 두 봉우리가 적당히 떨어져 보였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