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의 향연 45] 글밭에 핀 야생화 몇 송이

동지섯달 긴긴 겨울밤, 이제는 찹쌀떡 장수의 청량(淸凉)한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 하지만, 만년의 강수(江水)는 여전히 흐르고, 멀리 검단산의 어둠 속에 눈발 서리다. 만권 장서 곁에 두고 긴밤 세울적에 고인들의 책장 넘기는 소리, 청상의 속치마 벗는 소리보다 더 청량(淸亮)하다. 잘 가꾼 꽃밭의 기화요초들 찬서리, 눈발에 흔적없이 사라져도, 글밭의 만화방초는 천년의 향기를 남긴다. 글밭 언저리에서 주은 야생화 몇 송이를 묶었다. 조선시대 이인상(1710~1760)은 다양한 재능에도 서출이어서 음죽현감만을 지냈지만 시·서·화에 능해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아내를 잃고 쓴 '제망실문(祭亡室文)'에서 책을 아껴준 아내에 대한 절실한 고마움을 담았다. 아! 당신은 홀로 노고를 떠맡아 집안 걱정을 하지 않게 해주었소. 굶주리는 가운데서도 책을 팔지 않아 내 우직함을 지켜주었고, 추울 때도 꽃나무는 때지 않아 내가 측은지심을 지닌 채 살아가게 해주었소. 간혹 산수를 유람하다보면, 기분에 취해 글이 장황해지기도 했소. 집에 돌아와 지은 글을 읊을 때면 당신은 그때마다 따끔한 충고를 해주었소. 그리하여 내 글이 미사여구로 늘어져 도학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오.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도리를 이야기하며 즐기는 것은 옛날에도 있던 일인데, 우리가 좋았던 건 몇몇 친구들도 알고 있소. 아! 착한 여자란 참으로 가엽구려.(유미림 외 번역, <빈 방에 달빛들면>, 학고재, 2005) 20세기 아르헨티나의 시인·소설가·철학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는 호르헤 보르헤스는 흔히 '지식의 장인(匠人)'으로 불린다. 당대의 지식인 중에서 가장 많은 책을 광범위하게 읽은 독서가로도 알려진다. 그를 위대한 독서가로 만든 것은 아버지의 서가였다. 만약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버지의 서가라고 대답할 것이다. 실제 나는 그 서가로부터 한 발작도 나선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때가 종종 있다. 지금도 그것이 눈에 선하다. 유리로 선반을 온통 감싼 커다란 방에는 전체가 서가로 되어 있고, 5~6천 권의 장서가 들어 있었다. 대단히 근시였던 나는 당시의 접촉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거의 잊어버렸지만, <첸버스 백과사전>이라든가 브리태니카에 실린 강판인화 같은 것은 대부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보르헤스 〈자전적 에세이〉) '책만 보는 바보', 그래서 간서치(看書痴)라고 불린 조선시대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몹시 가난했다. 남산골 아래 집은 지극히 협소하지만 동 남 서쪽에 창을 내어 종일 해를 좇아가며 햇볕 아래서 책을 읽었다. 그의 글에 "'맹자'를 팔아 밥을 해먹다"란 것이 있다. 집안에 값나가는 것이라곤 겨우 <맹자(孟子)> 7권 뿐인데 오랜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20전에 팔아 그 돈으로 밥을 지어 실컷 먹었소. 희희낙락 영재(유득공)에게 가서 한껏 자랑을 늘어 놓았더니 영재도 굶주린지 오래라, 내 말을 듣자마자 <좌씨전(左氏傳)>을 팔아 쌀을 사고, 남은 돈으로 술을 받아 내가 마시게 하였소. 이야말로 '맹자'씨가 직접 밥을 지어 나를 먹이고, '좌구명'이 손수 술을 따라 내게 권한 것이나 다를 바 없지요. 그래서 나는 맹자와 좌구명, 두 분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칭송하였다오. 그렇다오. 우리들이 한 해 내내 이 두 종의 책을 읽는다 해도 굶주림을 한 푼이나 모면할 수 있었겠소? 이제야 알았소. 독서를 해서 부귀를 구한다는 말이 말짱 요행수나 바라는 것임을. 차라리 책을 팔아서 한바탕 술에 취하고 밥을 배불리 먹는 것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마음이 아니겠소? 쯪쯪쯪! 그대는 어찌 생각하오? (안대희 교수 번역)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