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불산 넘던 청년이 불러낸 생생한 민중의 역사

"저녁을 먹은 자랏골 사람들은 한 사람씩 정자나무 밑으로 모여들었다.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살랑거리고부터 좀 한산했던 정자나무 밑이 오늘 저녁은 장터처럼 술렁거렸다. 양문이 묏등에서 한쪽으로 조금 비껴 동각(洞閣)이 앉았고, 그 동각 마당의 축대 밑으로 예사 집 마당 서너 개 넓이에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여러 그루…" 송기숙 장편소설 <자랏골의 비가(悲歌)>에 나오는 구절이다. 소설은 묏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자랏골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양문이 묏등이 이야기의 중심이다. 부패한 권력에 빌붙은 양문이 일가와 대립하는 마을 사람들의 수난사를 다루고 있다. 소설 속 배경인 자랏골이 억불산 자락,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포곡마을이다. 주변에 여러해살이 풀인 부들(香蒲)이 많았다고 '포곡(蒲谷)'이다. 마을에 사람이 많이 살 땐 50여 가구 넘었다. 지금은 반토막 이하로 줄었다. 지난해 12월 27일, 이곳을 찾았다. 포곡마을이 소설가 송기숙의 태 자리(태어난 곳)다. 그의 삶과 문학이 시작된 곳이다. 소설에 묘사된 것처럼 마을에 아름드리 정자나무와 동각이 있다. 송기숙이 변해가는 고향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소재로 삼은 나무다. 애당초 정자나무 두 그루였지만, 지금은 한 그루만 있다. 태풍으로 쓰러지고, 밑동만 남아 있다. 정자나무 아래에 서니, 금세 자랏골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 것 같다. 소설 속에 나온 들돌도 동각 아래에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신통하게 구색이 맞았다는 그 들돌이다. "야, 이리 비켜봐라" 평식이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들돌 위에 앉아있는 문길이를 비켜서게 했다. 들돌을 한바탕 들어보겠다는 기세였다. 모두 호기심에 찬 눈으로 평식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들돌은 단순한 운동기구가 아니었다. 작은 들돌을 들어 허리를 폈다 하면 그때부터 어른 취급을 받아 무슨 품일을 나가도 그것을 한몫으로 쳐주었다. -소설 <자랏골의 비가> 중에서. 강단있는 삶이 녹아든 그의 작품 세계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