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2월 27일부터 시행된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제47조)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중임이나 연임을 제한하지 않았다. 또 국민들이 선출한 "2000인 이상 5000인 이하"(제36조 제2항)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게 대통령 선출권을 부여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이 된다"(제37조 제3항)는 규정도 뒀다. 대통령 선출기관을 대통령 휘하에 둔 것이다. 이 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하도록 한 뒤, 일반 유권자가 아닌 위 대의원들이 이들을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의원 3분의 1에 대한 실질적 선출권이 대통령에게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제59조 제1항은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대통령이 국회의 구성과 소멸을 좌지우지하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신체제는 사실상의 종신군주제였다. 이 같은 성격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모반사건에도 투영됐다. 1973년에 일어난 '윤필용 사건'은 유신 체제하의 박정희 정권이 왕조시대의 감상에 젖어 지냈음을 잘 보여준다. '후계자' 언급했다가 고문당한 윤필용 1970년을 전후한 때부터 박 정권에서는 4인방이 형성됐다. 3선 개헌 국민투표(1969.10.17.)가 통과돼 박정희의 1971년 대선 출마가 가능해졌을 때의 일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그 넷이었다. 이들이 상호 경쟁하며 정권을 떠받치는 속에서 박정희는 3선 관문인 4·27 대선을 통과하고 장기 집권 가도에 들어섰다. 그런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4인방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이 공동성명을 위해 김일성을 만나고 온 이후락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에 더해, 김재규와 윤필용 간의 경쟁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김재규가 윤필용을 견제할 목적으로 수경사령관 사무실에 도청기를 설치한 사실이 발각돼, 1971년 9월 23일부로 김재규는 육군 제3군단장으로 밀려나고 강창성 소장이 보안사령관직을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윤필용은 이후락에게 밀착했다. 이후락의 승승장구에 편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4인방 내부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이후락에게 힘이 쏠렸다. 박정희는 3선에 성공한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에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3선 가도를 떠받쳤던 4인방 체제가 동요하는 속에서 그는 종신군주의 길로 나아갔다. 자신의 장기집권을 불안정케 하는 이 상황을 박정희는 오래 좌시하지 않았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사 기자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