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투사가 된 전쟁, 부녀자들이 왜군에 들이부은 것

한겨울 남강이 두꺼운 얼음 옷을 입을 채비에 여념이 없다. 저 멀리 지리산을 넘어 온 살을 에는 북서풍이, 강의 얼굴을 사정 없이 두들긴다. 그러나 강은 한가위 앞뒤로, 물 위를 떠다닌 유등(流燈)을 잊지 않고 있다. 저마다의 소원과 소슬한 가을 바람이 등불에 넘실거렸다. 하필 그 계절일까? 진주성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때여서일까? 아니다. 분명 까닭이 있을 것이다. 1592년 가을, 남강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왜군의 조총 소리는 천둥처럼 울렸고, 성벽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선이 무너져 내리던 때다. 그 해 4월, 부산진성에서 타오른 불길이 다대포와 동래를 불태웠고, 파죽지세로 임금이 머무는 한양을 찔렀다. 왕은 비겁하게 도망치듯 몽진에 올랐다. 남해안 곳곳도 여의치 않았다. 김해와 웅천, 거제가 무너졌다. 창원과 함안, 의령도 마찬가지다. 바다의 이순신과 내륙의 곽재우 등 몇몇이 조선의 희망이던 백척간두의 시기였다. 진주성도 다르지 않았다. 진주가 무너지면 전라도가 무너진다. 그러면 전라 좌·우수영이 위급에 빠질 기세였다. 남해와 서해의 뱃길이 제압되면 그야말로 조선이 도륙을 당할 절체절명이다. 이에 진주성에서 반드시 왜군을 막아내야만 했다. 남강 북안의 돌출 지형 위에 세워진 진주성은 천혜의 성곽이다. 비록 무기와 병력이 열세라 할지라도, 단단한 진주성에 의지하고 군사를 효율적으로 운용한다면 충분히 싸울만한 전투였다. 그게 아니어도 목숨을 걸고 배수진으로 맞서야 했다. 그게 의(義)고 백성을 지키는 충(忠)이다.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이가 있었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 종6품에 불과한 지방관이다. 그의 관직은 한미했으나 뜻만은 웅혼했다. 조정은 피란 중이고, 지휘 체계는 무너졌다. 경상우병사도, 어떤 상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음속으로 '이 성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며 스스로 수도 없이 결의를 다졌다. 진주성 고려 말, 왜구 침략에 대비해 진주성을 돌로 고쳐 쌓았다. 남강 절벽에 서쪽 가파른 구릉에서 동쪽 작은 물길까지, 그리고 연꽃 만발하는 북쪽 대사지(大寺池)를 교묘하게 활용한 성곽이다. 당시 성곽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다만 내성이었던 현재 진주성으로 윤곽을 추정할 뿐이다. 둘레 약 1.7km의 내성은, 고려 시대 유산일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지난해 12월 중순, 관련 현장을 답사했다. 성의 운명이었을까? 임진왜란에 임박해 동쪽으로 외성을 넓혀 쌓으며, 제법 규모를 갖춘 천혜의 요새로 거듭나게 되었다. 지금보다 훨씬 큰 둘레 약 4km의 성곽으로 넓어졌으니, 면적으로는 약 3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2018년 동문 밖 '남체성' 일부 구간의 복원으로 그 실체의 단면을 확인한 바 있다. 진주 목(牧)을 다스리던 관아와 객사 등은, 성 안이 아닌 성 밖 북쪽에 별도 공간으로 존재했다. 이곳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 자리엔 공용의 청사 등이 남아 옛 치소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전까지 진주성은 눈부셨다. 고려 때 석성은 튼튼해 두터웠고, 새로 쌓은 외성의 성벽은 단단했다. 왜란을 빼고 진주성을 말할 순 없다. 이 성벽이 왜란을 맞아 나라의 운명을 짊어졌기 때문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