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기사 : 모두 투사가 된 전쟁, 부녀자들이 왜군에 들이부은 것 에서 이어집니다.) 1593년 여름, 진주성 높다란 성벽엔 아직 전쟁의 핏자국과 아우성이 서려 있었다. 피 묻은 바위는 씻기지 않아 여태껏 붉었고, 짙게 밴 화약 냄새는 나뭇가지와 잎사귀에 묻어 있었다. 의연한 건, 성 아래로 흐르는 푸른 남강뿐이었다. 지난해 가을 진주대첩에서 대패한 왜가 절치부심이다. 특히 히데요시가 이를 갈고 있었다. 그의 명령은 엄중했다. '전 병력을 동원해 진주성을 공략할 것. 진주목사(김시민)의 목을 베어 올 것. 그리고 그게 짐승이라 할지라도, 성 안에 살아있는 모든 걸 말살할 것.' 히데요시는 분명 전쟁광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실패를 전라도 점령 실패로 보았다. 바다에 이순신이 걸림돌이라면, 육지는 김시민이었다. 1차 진주대첩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왜군의 피해가 이의 증거였다. 남해안까지 밀려 왜성에 갇힌 왜군은 지난 패배를 곱씹었다. 호남을 점령해 군량미를 확보하고자 했다. 아울러 육로로 이순신의 근거지를 공략해, 재진격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고육지책이자 타개책이다. 이로써 육지와 바다로 길을 열어, 조선을 재정벌하겠다는 야욕이다. 이로써 임진년에 김시민이 지켜낸 진주성으로, 다시 전쟁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왜는 김시민이 세상을 떠난 줄 몰랐다. 진주목사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진주성은 철벽이었다. 재침 명령은 살아 있는 김시민이 아닌, 혼백이 된 김시민을 향한 복수이기도 했다. 진주대첩 2차 전투 1593년 6월, 남강 따라 조총을 맨 왜군이 진주성을 에워쌌다. 히데요시의 엄명에 마지못해 나선 다이묘도 있었다. 병력은 대략 10만에 가까웠다. 고니시 유키나가, 가토 기요마사 등 여러 장수가 5대로 나눠 성을 포위했다. 성 안에는 군사 5천과 6만 백성이 있었다. 대부분 1차 전투의 승리를 기억하고 있는 백성이다. 가장 잘 훈련된 군대를 거느린 곽재우 등은 이틀도 버티기 어렵다고 여겨, 성안에 들어 싸우기를 비껴갔다. 최정예 군대를 잃는다면, 나라 전체로 보아 큰 손실이라는 나름의 이유였다. 하지만 백성은 달랐다. 이번에 끝장을 내주겠다며 무기를 거머쥐었다. 특히 충청도 병마절도사 황진(黃進)이 돋보인다. 성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도 떠맡는다. 그도 이치와 웅치전투 승리로 왜의 표적이었다. 이순신·김시민에 버금가는 장수로, 백성에 대한 충의로 충만한 인물이다. 김천일, 최경회 등도 마찬가지다. 진주성을 지켜, 전라도를 보전해야 나라가 산다는 일념으로 성으로 들어 온 장수들이다. 황진이 성루에 올라 밖을 바라보았다. 흙먼지가 동문을 비롯한 삼면에서 일었다. 왜군 장수들이 각기 맡은 구간을 공격할 준비에 여념 없다. 병력은 20배 차이에 무기가 열 배 열세라도, 싸움에 임하는 마음만은 하나였다. 1차 전투의 김시민처럼, 방어선을 확인하고 병사와 수성 도구의 배치가 정연했다. 동남쪽 촉석루와 남강 절벽, 북쪽의 대사지, 동문의 평지 등 모든 곳이 적의 공격로였다. 성안 백성들이 밤새 돌을 나르고, 화살촉을 갈았다. 노인과 부녀자들까지 성벽으로 깨뜨린 기와를 모으고 식량을 날랐다. 성안 전체가 군영이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