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또 왔소?" "저도 모르겠는데요." 전날 '포고령 2호' 위반으로 만기 출소한 이가 다시 감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감방장은 의아해서 물었다. 6월 27일 만기출소했던 이는 청주형무소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청주경찰서 사찰과 형사에 의해 청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다음 날 청주형무소로 다시 돌아왔던 것이다. 6.25가 난 지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청주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과포화된 감방, 잠조차 허락되지 않던 여름 "오늘도 편히 자기는 글렀구만." 투덜대는 이에게 감방장이 인상을 썼다. 다시 입감한 이의 속이 문들어질 판인데, 그 상황에서 잠자리를 얘기했으니 감방장의 얼굴이 구겨질 만했다. 그렇지만 머쓱해진 이의 입이 나올 만도 한 상황이었다. 청주형무소 재소자 정원이 500명에 불과했는데, 6.25 당시 수감자가 1600명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미군정 시절 포고령 2호 위반자가 급증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양산됐기 때문이다. 청주시 탑동에 위치했던 청주형무소는 과포화 상태였다. 남자수용소 3개 동, 여자수용소 1개 동, 공장 5개가 있었는데, 이 시설로는 1600명을 수용하기가 어림없었다. 이런 이유로 교도소 안 공장 하나를 비워 임시 감방을 만들고, 그곳에 3년 이하 형을 받고 취업 중인 재소자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수용소 당국은 1950년 1월부터 교도소 담 밖 북쪽에 벽돌 건물 2층으로 감방 60여 개를 신축 중이었다. 하루라도 일찍 완공하려고 일요일도 없이 작업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재소자들은 미결사(未決舍), 기결사(旣決舍)를 가릴 것 없이, 꽉 조여 앉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야 했다. 다리를 뻗고 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교대로 잠을 자거나, 심지어는 감방 안에 줄을 맨 후 양쪽 다리를 들어 그 줄에 오금쟁이만 걸친 채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자기도 했다. 감방 안은 하지가 지난 여름철이라 원래 무더운 때이기도 했거니와 그 많은 사람들의 체온에서 뿜어 나온 열기로 달구어져 섭씨 35도에서 40도를 웃돌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시루에 떡을 찌듯 더웠다(홍두표, <나의 여운>, 2006). 하루하루가 지옥살이 상황에서 6.25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6월 28일, 부천형무소에서 재직 중이던 정태원씨가 왔다. 그가 전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울은 이미 인민군 손에 들어갔고, 한강 다리도 벌써 끊겼다는 것이다. 법무부 당국자들은 일선 형무소에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은 채 모두 피난하였다. 마포교도소 사정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소장과 간부들이 말단 직원들에게 교도소를 지키라고 명령해 놓고는 자신들은 슬금슬금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인민군이 정문을 덮치는 바람에 교도소 안에서 근무하던 다수의 말단 직원들만 죄수들에게 맞거나 인민군 총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에 계호과장과 직원들은 비상 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1. 전 직원은 생사를 같이한다. 2. 지금부터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받는 등 공무를 수행해야 할 소장과 서무과장을 제외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정문을 나가지 못한다. 3. 간수부장 3명과 선발된 간수 10명은 각기 2개 조로 나뉘어 주·야 교대로 정문 출입을 책임지고 통제한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