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인가 앞잡이인가, 프랑스 이주민 1호가 조선에서 한 일

지난해 성탄절을 맞아 12월 24~26일 tvN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 일대기를 담은 3부작 드라마 '청년 김대건'이 방송돼 관심을 모았다. 2022년 개봉된 박흥식 감독의 극장용 영화 <탄생>을 재편집한 것으로, 6부작 확장판도 OTT를 통해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2026년 병오년은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180주기다. 첫 한국인 천주교 신부를 탄생시킨 주역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피에르 필리에르 모방 신부다. 그는 로마 교황청이 우리나라에 파견한 최초의 서양인 신부이자 프랑스인 이주민 1호다. 올해는 한불 수교 140주년이자 모방 신부 입국 190주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사제, 임진왜란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천주교 사제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에 종군한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 신부다. 그러나 일본군을 상대로 사목 활동을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조선인에게 선교한 정황은 찾을 수 없다. 그로부터 2세기 가까이 지난 1779년 우리나라에 천주교 공부 모임이 생겨났다. 모임 일원인 이승훈은 1784년 중국 북경 북천주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돌아와 주변 인물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꾸려졌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목자 없는 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사제만이 세례를 제외한 각종 의식을 집전할 수 있어 교회법 위반이었다. 1790년 북경교구는 조선교회에 전례 금지령을 내리고 선교사 파송을 약속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인과 용모가 비슷하면 비밀리에 활동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중국인 주문모를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입국해 신앙의 씨앗을 뿌리다가 1801년 신유박해로 처형돼 첫 외국인 천주교 순교자가 됐다. 신도들이 몰살하거나 숨어버려 암흑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조정의 혹독한 탄압은 천주교가 지식인 중심에서 상민과 천민들에게 확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교황청은 1831년 9월 9일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독립시키기로 하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마카오에서 만주까지 왔다가 국경 경비가 삼엄해 때를 기다리던 중 1835년 10월 20일 뇌내출혈로 선종했다. 모방이 꼽은 한국인 사제 후보 기준 4가지 브뤼기에르와 함께 만주까지 따라온 신부가 모방이었다. 그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시골 마을 바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이어교구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뒤 고향 인근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다가 아시아 선교에 뜻을 두고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돼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난 뒤 조선 선교사를 자원해 교황청 허락을 받았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1836년 1월 12일 상복 차림에 삿갓을 쓰고 조신철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을 건넜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들어온 뒤에도 얼굴과 신분을 감추려고 늘 상복 차림으로 다녔다. 정약종 아들이자 정약용 조카인 정하상의 도움으로 서울 뒷골(중구 주교동)에 자리 잡고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로도 전도에 나섰다. 통역을 대동했으나 한문에 능통해 필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누추한 움막에 살면서 잡곡밥과 산나물로 끼니를 때우느라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신앙심으로 견뎌냈다. 조선식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으로 백다록은 반석이란 뜻의 세례명 베드로를 음차한 표기다. 그의 헌신 덕분에 신유박해 직전 1만 명에서 6000명으로 줄어든 천주교 신자는 9000명으로 회복됐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