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우거진 포진지라고 썼다 지운다. '녹음이' 지우고, '우거진'을 지우고, '포진지'만 남는다. 외양포 포진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낱말들 같아서. 그러나 내가 그 여름에 보고 온 그곳은 온통 초록이었다. 아주 짙은 녹음 아래 햇볕은 잠시 비껴간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흥건해지는 폭염의 날씨에도 정작 포진지를 그대로 보존한 그곳은 서늘한 기운마저 들었다. 그러니까 제방을 쌓은 진지 주위로 대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은 요새에 가깝다. 그래서 이렇게 적막하고, 어둡고, 축축한 것일까. 잊지 말고 기억하기 위해 100년 전에 여긴 전쟁을 벌이던 곳이었다. 이 터 입구에 적힌 안내문에도 간략하게 설명되었듯이, 이곳은 주민들을 몰아내고 일본군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기 위해 주둔한 현장이자 외양포의 아픈 역사다. 그리고 진지를 세운 터가 바로 여기다. 아니나 다를까 곳곳에 전쟁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벽에 움푹 팬 것은 어쩌면 포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리 크지 않은 터를 돌아다니며 보게 되는 것은 발사대나 화약고, 상황실 등이다. 그 터에 남은 몇 개의 동굴 같은 곳을 들어갔다 나올 수가 있는데, 그 안은 마치 시대를 거슬러 간 느낌을 준다. 그만큼 역사적 현장이 잘 보존되어있다는 말이다. 물론 이 터를 관리하는 직원이 상주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습한 기운과 함께 서늘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 아무래도 이곳에 서린 영혼이 여기를 가꾸고 있는 것만 같고. 내내 그런 생각을 한다. 어디선가 일행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져 오는 것을 들으며, 크지 않은 터를 걷다가 말이다. 생각과 생각을 이어 붙인다. 이 우거진 녹음이 전쟁의 흔적과 어우러진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이 또한 인간과 자연이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표인 것만 같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