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연세도 있으신데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전들 어떻게 합니까? 솔직히 우리 모두 처음부터 매일 욕먹을 각오하고 월급 받는 것 아닌가요? 정 힘드시면..." "아니, 그런 뜻이 아니..." 2016년 어느 날이었다. 나는 50대 후반에 막 어느 카드사 하청 콜센터의 텔레마케터로 일을 시작했다. 창밖, 너무나 좋아하는 접시꽃이 환장하게 피어 있었다. 나는 그날 나이 어린 센터장의 조금은 무례한 언사에 불쾌했지만 이내 하던 말을 얼버무렸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나는 눈물을 참으려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떼가 오후 세 시를 가르며 절망의 첫 자음 'ㅈ' 자로 날아가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는 텔레마케팅 무경력자도 어느 정도 콜센터에 취업할 수 있었다. 지금 같았으면 그 일자리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이직률이 꽤 높다고 하는데도 텔레마케터 면접이라도 보려면 최하 콜센터 인턴 경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구직 사이트에는 수시로 텔레마케팅 구인공고가 뜬다. 그만큼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것 같다. 2015년, 나는 하던 사업이 부도가 났다. 단단히 믿었던 협력사는 등을 돌렸고 오래도록 친절했던 거래은행도 태도를 싹 바꿨다. 그러나 이 척박한 시대, 나는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었다. 정직하게 돌아보면 사업에 대한 당시 내 과욕과 판단 실수도 컸었다. 나는 허름한 단독주택 반지하 월세방으로 몰렸고 가족들의 내일은 캄캄해졌다. 그해 가을 어느 밤, 나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양화대교 난간 근처에 홀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술병을 쥔 내 손이 덜덜덜 떨렸고 하늘은 빙빙 돌았다. 그 아래 멀리 희미하게 선유도공원이 보였다. 그 공원으로 바뀌기 전 수돗물 정수장 시설이 있던 터다. 내가 한때 열정적으로 자재를 납품하며 땀을 뻘뻘 흘리던 일터이기도 했다. "여보, 너무 사랑해요. 나쁜 마음 절대 먹으면 안 돼요. 친정 오빠가 우리를 도와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 다시 일어설 수 있어요. 제발 전화 좀 받으세요." 아내가 내게 계속 전화를 했지만 내 전화기에는 부재중만 찍혔다. 그러자 아내의 문자 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젊은 날 연애 시절부터 내 심리를 마법사처럼 꿰고 있었다.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그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누구와 사업재개 문제로 대화하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아내가 빨리 오라며 한없이 엉엉 울었다. 나는 문득 택시 기사의 애환을 다룬 그 당시 '자이언티'의 유명한 노래 '양화대교'의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희미한 한강의 불빛이 거꾸로 내 근황을 물으며 불안하게 깜박였다. 그래, 나와 아내는 꼭 행복해야 했다. 가여운 아내가 빨리 보고 싶었다. 무던히도 쪼들리던 나였지만 그 양화대교에서 급히 택시를 탔다. 그리고 집 앞에서 내리면서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다. 내 가슴에 홀로 떠돌던 '자이언티'의 그 노래가 택시 기사의 얼굴에 몇 움큼 가물가물 오버랩 되었다. 그날 독한 마음을 먹고 한강으로 출발했던 나는 새 옷이 필요 없었다. 너무나 허름한 옷차림의 나를 어리둥절한 표정의 택시 기사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도 내게 그 '양화대교'는 아주 특별한 의미의 다리다. 중국계 미국인 지리학자 '이-푸 투안 (Yi-Fu Tuan)' 박사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엄격히 구분했다. 내 아픔이 서린 '양화대교'로 예를 들면 '공간'으로서의 그 다리는 그냥 사람들이 알고 있는 추상적인 초대형 교랑일 뿐이다. 그러나 그 교량에서 누군가 삶의 커다란 반전을 맞이했다면 그 교량이라는 '공간'은 그 사람만의 구체적 '장소'로 바뀐다. 그러므로 그날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던 내 외출의 종착지 '양화대교'는 내겐 그립고 아픈 '장소'다. 나는 부도 후 블록 공사장 허드렛일을 찾았다. 여기저기가 멍들고 이유도 모르게 피가 났지만 버텼다. 그러나 단 이틀 일하고 내내 못마땅한 얼굴을 하던 작업반장에게 쫓겨났다. 육신은 늙고 거친 노동에 서툰 내게는 당연한 퇴짜였을 것이다. 그 후로도 나를 받아주는 공사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급해진 나는 사무라도 보는 업체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오십 후반을 바라보는 나를 채용해주는 사무직은 더욱 없었다. 그 후 아내의 친정 오빠가 우리의 숨통을 일부 틔워줬다. 그러나 언제까지 처남에게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구직 사이트에서 운명처럼 텔레마케터를 알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텔레마케터는 그 어떤 자격증이 없어도 열정만 있으면 가능했다. 깨금발로 서 있는 나는 배고픈 열정이 있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