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도 '엄지척', 남도 유명 사찰 글씨의 주인공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이후 필관(筆管)을 비스듬히 잡고 편봉(偏鋒)으로 글씨를 썼다. 획의 뒤쪽과 왼쪽은 붓끝이 지나가 먹색이 진하고 윤기가 있으나, 아래쪽과 오른쪽은 붓의 허리 부분이 지나가 먹색이 묽고 깔끄럽다. 획이 모두 반신불수가 되는 이유다. 붓털을 뭉쳐 구부정하게 하고, 손이 붓보다 먼저 나가면서 붓을 끌어당겨 획이 둔하고 힘이 없어진다.' 당대에 훌륭한 서예가가 드문 이유에 대한 원교 이광사의 진단이다. 그가 쓴 서예 교본 '원교서결(圓嶠書訣)'에 나와 있다. 재주를 타고난 사람일지라도 이런 습관에 젖고 얽매여 있다는 비판이다. 그는 대안도 제시했다. '옛사람들은 모두 필관을 곧게 세우고 붓을 펴서 글씨를 썼다. 모든 붓털이 가지런히 힘을 쓰게 해 한 획 안에 위와 아래, 안과 밖의 다름이 없게 했다. 송․명에 이르러서도 비록 굳세고 약하며 날카롭고 둔한 차이는 있으나, 붓놀림(運筆)은 그렇게 했다.' 원교 이광사(1705∼1777)는 이름난 문인이고, 서예가였다. 진서, 초서, 전서, 예서에 두루 뛰어났다. 중국과 다른, 우리의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했다. 옥동 이서, 공재 윤두서를 거쳐 이광사에 의해 완성된 동국진체는 중국 서체에서 벗어난 자주적 글씨라는 평을 받았다. 화려하면서도 자유분방함이 특징이다. 가장 한국적인 서체라는 얘기다. 동국진체는 그의 호를 따 '원교체(圓嶠體)'로도 불린다. 이광사는 서예 이론서인 '원교서결'도 썼다. '동국진체'와 '원교서결'은 그의 유배 기간에 완성됐다. 유배지에서의 울분을 글씨로 풀어내며 창작의 꽃을 피운 것이다. 이광사의 유배지가 전라남도 완도에 속한 섬, 신지도였다. 그의 삶도 73살 때 유배지에서 마감됐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