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만 장 위조? 79년 만에
드러난 '위폐사건'의 진실

한반도를 점령한 미·소 양국 군대는 자국에 유리한 정치세력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임시정부 수립 및 최장 5개년 신탁통치'가 결정된 뒤에는 더욱더 그랬다. 3상 회의 결정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6년 3월 20일 개회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기 5월 6일부터 무기한 휴회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 내의 어떤 정당 혹은 단체와 더불어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할 것인가에 관한 공감대가 쉽사리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7일에 나온 미군정 공보부 발표문에도 "미·소 양 대표 간에 있는 민주주의 정당과 단체와의 협의에 관한 의견 상위(相違)가 완전히 해결되지 안었다"라는 문구가 있다. 자국을 적대하는 세력이 임시정부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미소공위 결렬의 핵심 요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고민은 소련보다 깊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해야 한국임시정부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데, 남한 친미세력은 모스크바 3상 회의를 반대하며 반탁운동을 벌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한국 임시정부가 반미세력의 독무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발한 사건이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다. 남한 반미세력인 조선공산당이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시설에서 오늘날의 수십 억 원에 해당하는 당시 화폐 1200만 원(백원권 12만 장)을 위조했다는 사건이 그해 5월 15일 미군청정에 의해 발표됐다. 이 사건은 79년 뒤인 2025년 12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재심 판결에 의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은 이 사건 주모자로 몰려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이관술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력한 증거인 피고인들의 자백이 불법구금하에서 이뤄져 증거의 가치가 없고, 제3자 진술이나 검증조서 혹은 압수물 역시 유죄의 증거로 채택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이관술의 유·무죄에 관한 재심 재판이었지만, 다른 피고인들의 자백 역시 유죄의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 그래서 이 재심은 조선정판사 사건 자체에 대한 재심의 의미도 일정 부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재심 공판에 나선 검찰 역시 작년 11월 15일에 무죄를 구형했다.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건의 핵심인물인 이관술이 유죄라면 이를 입증할 당시의 수사자료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검사가 그런 이유로 무죄를 구형했다. 이 때문에 이 재심은 서울중앙지법 단계에서 최종 확정됐다. 찾아낸 위폐는 단 한 장도 없었다 대규모 마약조직이나 조폭단체를 일망타진했다는 보도와 함께 뉴스 화면에 자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수사기관이 압수한 마약 실물이나 식칼·방망이 등이 시청자들의 눈앞에 증거로 제시된다. 백 원권 12만 장이 위조됐다는 조선정판사 사건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위폐 몇백 장 정도는 눈앞에 제시돼야 믿음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미군정 수사기관은 그런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들이 스스로 찾아낸 위폐는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미군정 수사기관은 이관술과 함께 체포된 조선정판사 기술과장 김창선(당시 36세)에게 부탁했다. 이 장면은 이 사건 변호인인 백석황의 최후변론을 담은 1946년 11월 1일 자 <동아일보>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미군정 경찰은 김창선을 데리고 은행을 방문했다. 그런 뒤 "네가 만든 지페를 차저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김창선이가 백원짜리 두 장을 차저"냈다고 위 신문은 전한다. 김창선이 골라낸 게 위폐였다면, 누가 골라냈든 간에 위폐가 발견된 그 현장을 의심해 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미군정 경찰은 위폐의 출처로 조선정판사를 자신 있게 지목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