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한 장의 사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을 통해 지금 우리가 보는 한강이 원래부터 그랬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나아가 강을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고 한강의 고유한 자연성과 가치를 되찾는데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위는 오늘날 서울 항공사진이다. 무엇이 눈에 띄는가? 영어 알파벳 'W' 모양을 닮은 듯 인공화된 한강의 모습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평균 폭도 1.2km 정도로 매우 넓을 뿐만 아니라 모두 균일화되어 있다. 한강을 처음 보는 외국인들은 한강의 넓은 폭과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우리도 한강의 웅장함을 서울의 랜드마크인양 자랑한다. 그런데 이렇게 넓고 큰 한강에 신기하게도 백사장 하나 제대로 볼 수 없다. 그 흔한 모래 한 톨 만져볼 수 없다. 왜일까? 1960년대부터 한강을 마구잡이로 난개발했기 때문이다. <한강, 1968>의 저자 김원 선생에 따르면 해운대 해수욕장 면적 700배 크기의 모래사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상상이 가는가? 요즘 말로 이 정도면 환경 파괴를 넘어 국가적 재앙이다. 오늘날 한강은 보기에는 좋아 보일지 모르나 시민들의 삶과 유리된 채, 강변도로와 콘크리트 제방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강이 한강의 원래 모습이라고 크게 착각하고 있다. 1950년 서울 항공사진에서 발견한 '한강'은 달랐다 필자는 서울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최근 한강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을 발굴했다. 위에 보이는 사진이 바로 그것이다. 잘 안 믿기겠지만, 이 사진을 발굴하려고 지난 2017년부터 여러 차례 미국 땅을 넘나들었다. 발굴 과정에 얽힌 에피소드도 적지 않지만, 그 이야기는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다만 이 항공사진은 우리 역사의 소중한 모습을 담은 '타임머신'이자 자연이 빚은 '예술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간 우리는 여러 매체와 자료를 통해 한강의 옛 모습을 접해왔다. 물론 60대 이상의 분들은 그 시절 한강을 온몸으로 기억하고 추억한다. 하지만 서울 한강의 원형과 전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본 적은 드물 것이다. 얼핏 보면 과연 여기가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한강의 모습이 지금과는 너무 다르다. 물리적 시간으로 70여 년밖에 안 지났지만, 수천 년을 흐르던 한강이 불과 반세기 만에 그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혹자는 '한강의 기적'이 만든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필자도 피땀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을 부정하지 않는다. 허나 그 기적의 열매를 맺는 동안 우리의 한강이 얼마나 훼손되고 상처를 받았을지 한 번쯤은 되돌아봐야 한다. 전 세계인이 놀랄 정도로 이렇게 넓고 큰 강에 모래 한 톨 찾기 어려운 현실이 과연 정상일까?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을 다시 보자! 10km 높이의 고고도에서 촬영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얀 모래사장들이 쉽게 눈에 띈다. 한강의 폭도 지금과는 달리 훨씬 좁았다(약 200~300m). 당연히 수심은 지금보다 깊었다. 창릉천 하구의 모래섬, 구불구불한 불광천과 홍제천, 반달 모양의 난지도, 안양천, 선유봉과 밤섬, 여의도와 용산강, 노들섬과 이촌 백사장, 저자도, 잠실도, 부리도, 무동도, 송파강과 삼전도, 탄천과 양재천 그리고 성내천까지, 지금은 사라진 풍경들이 사진 속에 모두 존재한다. 그런데 사진 속 그 많던 섬들과 백사장이며 지천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여의도와 맞먹을 정도로 큰 섬이었던 '난지도' 창릉천은 삼각산(북한산)에서 발원해 한강변 행주산성 옆으로 흐르는 지천이다. 한강과 창릉천 물길이 만나는 곳은 예부터 '행호'라고 불렀다.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을 보면 창릉천은 지금과 달리 매우 구불구불했다. 창릉천과 반달 모양의 난지도 사이에는 넓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있고 심지어 큰 모래섬들까지 있었다. 지금의 지형과는 너무도 다르다. 잘 알다시피 이 일대는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행주대첩의 역사적 격전지였다.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이 수적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한강의 지리적 이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행주치마 전설을 넘어 우리가 잘 모르는 전란 속 한강 이야기도 분명 흐르고 있을 것이다. 행주산성과 창릉천 주변의 물길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러나 1930년대 봉대산과 덕양산(행주산성)을 잇는 제방이 생기고, 1980년 난지도와 행주산성 사이 긴 제방을 쌓으면서 이 일대의 지형은 완전히 바뀐다. 홍수와 수해로부터는 자유로워졌지만 드넓었던 범람원과 모래톱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창릉천의 옛 물길은 그 원형을 잃고 말았다. 난지도는 오랜 세월 한강을 대표하는 섬이었다. 난초와 영지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1970년대 후반 쓰레기 매립장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수백 명의 주민들이 살던 삶의 터전이었다.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을 보면 이 시기 난지도는 여의도와 맞먹을 정도의 큰 섬이었다. 지금과 달리 난지도를 둘러싸고 흐르는 샛강(난지천)도 볼 수 있다. 난지도 앞에는 대규모의 자연 모래톱도 보인다. 언뜻 봐도 수십만 평은 넘는 크기다. 이 모래톱은 예전부터 얼마나 장관이었든지 겸재가 그린 <경교명승첩> 속 '금성평사(錦城平沙)'라는 작품으로도 잘 남아 있다. 이 거대한 모래톱은 1970년대 초까지도 유지되었으나 이후 무분별한 준설로 지금은 모래 한 톨 찾아볼 수 없다. 난지도 오른쪽을 보면, 불광천(까치내)과 홍제천(모래내) 물길 또한 구불구불 흐른다. 원래 불광천과 홍제천은 지금처럼 한강으로 바로 합류하지 않고 난지천으로 흘러 들어갔다. 게다가 홍제천은 오늘날과 달리 '3'자 모양의 큰 물줄기가 하나 더 있었다. 이 물줄기는 1960년대 성산지구 토지구획사업으로 주거지로 바뀌어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다. 난지도는 1977년 샛강인 난지천을 매립하면서 더 이상 섬이 아닌 육지로 바뀌고, 불광천과 홍제천 또한 그 원형을 잃고 오늘날과 같은 인공수로로 바뀌었다. 난지도는 오늘날 그저 땅이름으로만 남았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