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서 만난 위층 오빠, 우리 아이들의 선생님이 되다

전쟁 같은 아침, 출근 준비와 아이들 유치원 등원 준비를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타면 종종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위층에 사는 발달장애가 있는 남자아이다. 작년에 우리 아파트로 이사 온 뒤로 아침마다 자주 마주친다. "얘들아, 위층 오빠다. 안녕!" 특수교사인 나는 학교 밖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만나면 괜스레 반가움이 올라온다. 그러나 발달장애 특성상 다른 사람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이는 나를 흘낏 보고 이내 엘리베이터 손잡이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당황해하는 건 우리 아이들이다. 엄마가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위층 오빠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오빠에게 '인사해야지'라며 다그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오빠를 보고 그저 웃는다. 장애를 '결핍'이 아닌 차이로 아이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다. 시선을 나와 위층 아이에게 번갈아 두던 아이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질문을 쏟아낸다. "엄마, 오빠가 왜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잡고 혼잣말해?" "왜 엄마가 먼저 인사했는데 대답을 안 해?" "오빠가 기분이 좋아서 그랬나 봐. 아까 엄마 쳐다봤잖아. 그거면 된 거지." 그렇게 대답해도 또 질문이 이어진다. 기분이 좋은데 왜 혼잣말을 하는지, 왜 말을 하지 않는지 궁금한 것이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해보지만, 대화의 끝은 늘 "왜 오빠는 말을 못 해?"였다. 아이들의 질문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자신들은 너무나 쉽게 말을 하고 대화를 하는데, 오빠는 왜 그렇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멈칫한다. 아이들이 장애를 '무언가를 못하는 상태'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질문에 답하다 보면 어느새 '할 수 없는 것' 위주로 대화가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장애를 이해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실감한다. 특수교사이자 엄마로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장애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기를 바랐다. 장애를 결핍이나 부족함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른 모습 중 하나로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이런 고민은 직업윤리 때문만이 아니다. 아이들이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길 바란 것은 나 자신과 우리 아이들 모두를 위해서였다. 편견은 생각보다 쉽게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스며든다. 예를 들어 '장애인은 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 어느 순간 독립성과 생산성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타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 스스로에게도 모든 것을 다 해내야 한다는 압박으로 남는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