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우리 독립운동가들, 특히 백두산이나 타이항산 등 깊은 산중이나 인가가 없는 만주 내륙에서 빨치산활동과 게릴라 무장투쟁을 하는 경우, 식량·신발·성냥·소금이 가장 곤란한 문제였다. 도시에서 단체를 만들고 광복운동을 하는 경우는 부단한 일제군경과 밀정들의 추적으로 안위가 위협을 받았으나, 적어도 성냥이나 소금 등 생존의 절대 필수품은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사람이 일정기간 동안 염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몸이 붓고 힘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과다 섭취는 인체에 치명상이 되지만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흔히 게릴라 활동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비유된다. 물이 없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듯이, 게릴라는 주민들의 지원이 있어야만 활동이 가능하다. 베트남이나 남미지역의 게릴라 활동은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만 한반도와 만주·노령에서는 겨울의 혹한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항일투쟁이 그만큼 어려웠다. 일제가 한국을 침략할 때 이른바 삼광작전(三光作戰)이라 하여 의병지역에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약탈하고 모조리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은 의병마을에 들어가면 식량과 가축을 약탈하고 장독을 깨부수고 소금가마는 우물에 던졌다. 또 청산리·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이 인근 지역 조선인 거주 마을을 불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한 '경신참변' 때도 유사했다. 활동의 근거지를 없애버리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에게 소금이 얼마나 중요했던가.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의 회고록, 해삼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시절의 일이다. 깊은 내륙이라 소금이 귀했다. 50리, 60리 가야 소금을 구할 수 있었다. 농삿거리 서너 말 가져 가야 소금 한 말 바꾸는데 농삿거리가 있어야지. 또 있다 해도 누가 무거운 걸 지고 그 먼곳까지 갈 사람이 있어야지. 바깥 어른들은 독립운동 하시고 주로 외지에 나가 계셨으니까.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105쪽, 정우사, 1995.) 우리 독립운동사는 독립운동가들이 '먹고 입고 자는' 인간의 기본 문제가 삭제된, 마치 로봇처럼 그려진다. 단체들의 조직·강령·대일항쟁 과정 등은 상세히 소개된 데 비해 그들이 무엇을 먹고 어떤 옷을 입고 어디서 거처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달리 표현하면 독립운동의 거시사(巨視史)는 어느 정도 연구가 돼 있는데 비해 여성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의료·장비·식생활 문제 등 미시사(微視史)는 아직 초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다. 경제학이 거시경제학과 미시경제학으로 나누어지는 것처럼 독립운동사도 미시사쪽에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료의 부족이다. 특히 무장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실종되고, 게릴라 활동의 특성상 제도로 기록을 남기기 어려웠다.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에 이어 중국 화베이(華北) 타이항산(太行山) 전투 당시 부녀국 대장이었던 이화림(李華林)은 여성다운 섬세함으로 대원들의 의식주 문제를 기록하였다. 이화림은 1939년 구이린(桂林)에서 조선의용대 여자복무단 부대장으로 활동하다가 1941년 다시 타이항산 지구 팔로군 항일근거지로 이동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