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게엄' 보며 결심,
특전사 꿈꾸던 청년이
택한 곳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으니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던 남자는 "감옥"을 선택하기로 결심했다. 강원도 육군 입대(2월 23일)를 앞둔 김민형(27)의 입영통지서 하단엔 '입영'과 '입영 연기'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입영도 입영 연기도 선택할 수 없던 민형은 선택지엔 없는 '입영 거부'를 선택하기로 했다. 그는 '반전'과 '평화'라는 비종교적 이유로 입영과 대체복무까지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다. 입대 당일엔 입영 장소(강원도 양구군 국토정중앙면 용하리)로 가지 않고 여의도 국회로 향할 예정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가 있음에도 민형은 왜 병역을 모두 거부하고 실형을 살기로 택했을까. 여전히 대체복무제가 갖고 있는 '문제'와 병역법 위반으로 감옥을 다녀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들을 병역거부 당사자로서 증언하기 위해 민형은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 이야기들이 이어지고 연결되면서 민형을 국회 앞으로 이끌었다. 특전사 꿈꾸던 병역거부자 그곳에서 군대는 '익숙한 일상'이었다. 서울보다 개성이 가까운 접경지 마을(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문산리)에서 민형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등하교 때면 군인들이 훈련받는 "따다다닥"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을엔 전차용 구조물과 방어벽 등 군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반도 정세가 악화하면 민형과 친구들은 "오늘따라 총소리가 격하네", "우리는 전쟁 난지도 모르고 죽을 거야"라며 농담을 섞어 얘기했다. 그런 그가 고등학생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난 특전사에 갈 거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할아버지와 살며 민형은 군인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군대는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이었고 국가를 지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늘 해병대 모자와 점퍼를 입고 다니며 해병대 정신을 강조했다. 그런 할아버지를 보며 민형도 "이왕 가는 거 제대로 해보자"라며 특전사 입대를 꿈꿨다. 파주와 서울을 잇는 자유로(고속화도로)를 타면 임진강 너머로 북녘 땅이 펼쳐졌다. 20살이 된 민형은 대학 생활을 위해 파주를 떠나 서울에 가서야 군대가 익숙한 일상이 아님을 깨달았다. 서울에선 군부대도 보이지 않았고 총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입버릇처럼 내뱉던 "특전사"의 꿈은 민형의 삶을 돌고 돌아 최근 그가 작성한 '병역거부' 소견서에 이렇게 담겼다. "한때 특전사를 꿈꾼 이유는 국가와 사람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군대는 제가 바라는 평화에 다가가기 어렵게 한다는 결론에 가까워졌습니다." (병역거부 소견서 '평화를 상상하고 평화를 선택합니다' 중 일부) 입대에서 병역거부로, 그가 180도 달라진 삶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고 민형은 말했다. 고등학생 1학년 때 맞닥뜨린 세월호 참사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이후 평화나비 네트워크(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연합동아리)와 학내 페미니스트 동아리를 거쳐 지금은 '전쟁없는세상'과 '한베평화재단'에서 평화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민형은 한베평화재단의 베트남전 진실규명 활동으로 전쟁의 구체적인 얼굴들을 만났다. 그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학살이 집중됐던 퐁니·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을 찾은 적이 있었다. 두 마을의 민간인학살 피해생존자인 두 응우옌티탄씨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일정에 함께했다( 관련 기사: 한국 국회 찾아온 두 명의 '응우옌티탄' ). 미디어로만 접하던 전쟁의 참상이 그의 마음에 크고 긴 파동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베트남 평화기행을 갔을 때 마을마다 있던 위령비엔 한국군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었어요. 그 위령비에 참배하고 초혼식을 했어요. 억울하게 죽은 이름들이 먹먹하고 무겁게 다가왔어요. 베트남전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끝나지 않은 일이었어요. 그리고 얼마 뒤 한국에 온 두 응우옌티탄님이 전쟁을 증언하며 부당함에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고, 저도 병역거부를 결심하는 데 큰 용기를 얻었어요."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