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혔던 백악이 스르르 열렸다. 그랬어도 자연스럽진 못했다. 동쪽은 말바위 안내소, 서쪽은 창의문 부근에서 신분증 제시라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했다. 완전한 개방은 아니었다. 오래 닫혔던 길엔 그런 절차가 잔재처럼 남았었다. 군사 시설로 막힌 기억이 온전히 지워지지 않았었다. 지금은 비로소 다 열렸다. 휘어 굽은 성곽이 숲과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선사한다. 고즈넉하다는 건 이런 풍경과 분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게 실감 난다. 숙정문에 오르는 동안 성 돌 사이로 여러 시대의 흔적이 겹쳐 보인다. 태조의 성과 세종의 성, 숙종의 성 돌이 모양과 크기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깎인 성 돌 하나에도 각 시대의 기술과 자본, 노동 숙련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도성을 쌓고, 고치고, 다시 수리한 각 왕의 시대는 안정된 치세에 모든 게 풍성했다고 추정된다. 옛말로 태평성대였을까. 도성 북문이니, 겨울을 상징한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4대 문의 하나로 성문을 두었으나,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왕조시대 내내 문루가 없었다. 따라서 무지개 모양의 문도 늘 닫혀 있었다. 북문이 문루를 갖추게 된 건 아이러니다. 1968년 무장한 31명의 북한군이 청와대를 직격으로 노려 침투한다. 이른바 '1·21사태'다. 이때 한양도성이 방어용 시설로 재조명되었나 보다. 1976년 북문 위 성벽에 벽돌로 여장을 얹고, 문루를 앉혔다. 성곽은 이처럼 한 번 쌓고 만 구조물이 아니라, 권력이 바뀔 때마다 다시 손을 덧댄 장소였다. 촛대바위 옆에 박혔었다는 일제의 쇠말뚝도 마찬가지다. 땅의 기운을 끊겠다는 말이 미신처럼 들리지만, 이 땅의 기운과 산이 품은 질서를 무력화하려는 의도만은 분명히 읽히고도 남음이 있다. 닫히고, 덧씌워지고, 다시 열리는 시간이 이 짧은 구간에 포개져 있다. 성은 남고, 사람은 흐르고 숙정문 밖 성곽에서 단원 김홍도의 '성하부전도(城下負錢圖)'가 떠오른다. 그림에는 산이 없다. 대신 서로 다른 모양의 성곽이 화폭을 채웠다. 그 아래를 보부상으로 추정되는 두 인물이 지난다. 각기 다른 시대에 성곽이 쌓였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성곽은 땅에 박혔지만, 사람과 재화는 물처럼 흐른다. 이 흐름의 경계가 성곽이다. 멈춤은 자체로 끊김(滅)이다. 통제나 조절일 수 있다. 이를 위해 쌓은 구조물 아래로도 흘러야만 하는 게 곧 이음(生)이다. 단원의 그림에서처럼, 어쩌면 성곽이 생멸의 주관자인지 모르겠다. 숙정문에서 급변한 능선의 가파름이 제법이다. 성곽은 유려하게 여러 번 몸체를 구부렸다가 다시 편다. 촛대바위를 지나 한참을 그렇게 기어오른다. 그 정점에서 밖으로 길게 뻗어나간 성벽이 걸음을 잡아당긴다. 치성(雉城)과는 또 다른 곡장(曲墻)이다. 능선 셋이 한데 모인 곳에 곡장이 앉았다. 동쪽은 북악팔각정이고, 서쪽이 백악 정상이다. 성곽이 곧 길이 된 자리다. 길은 이처럼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 팔꿈치처럼 맺혀서 이루어진 일종의 '마디(結節)'다. 이 마디가 모든 변화의 실마리인 셈이다. 발전과 쇠락도 이 마디를 어김없이 거치게 마련이다. 흐른다는 건 그래서 바뀜과 이음의 연결이다. 그게 비록 고단한 시시포스(Sisyphus)의 노동일지라도 말이다. 청운대에 가까워지면 이 대비가 더욱 또렷해진다. 성곽이 높고 단단해질수록, 그 아래를 따라 길도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 구간을 걷다 보면, 성곽이 도시를 막았던 시간보다 사람들이 성을 우회하며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