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가 어른이 안 계신 올해 설은 몸도 마음도 허전했다. 남편은 회사 일이 바빠 설날에도 일하러 나갔고, 아들네는 손자의 알레르기가 있어서 집에 오지 못하였다. 부산에 사는 두 시동생 가족 여섯 명이 설을 쇠러 우리 집으로 왔다. 그래도 가족들 덕분에 완전히 외롭지는 않았다. 시동생 가족이 설날 오후에 다 돌아가고 나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기력이 찾아왔다. 설거지는 동서들이 해 두고 갔지만, 마지막 정리조차 하기 싫어 그대로 두었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지 문득 돌아가신 어머님도 생각나고 친정엄마도 생각났다. 두 분이 살아계실 때는 시가며 친정을 다니느라 분주했다. 며느리로 딸로 살아내야 하는 의무감에 때론 지칠 때도 있었다. 이제는 그 어디에도 내 한 몸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설날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밀려왔다. 설 다음 날이었다. 냉장고에는 설날에 준비해 둔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들어있었다. 고기류는 손이 가지 않았다. 갑자기 엄마가 해주시던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냉장고에서 두부와 김치 그리고 파를 꺼내놓았다. 엄마는 쉰도 되기 전에, 여덟 손주의 시간을 먼저 사셨다. 4남 2녀를 키운 뒤, 여덟 손주까지 품에 안고 사신 분이다. 맏이와 막내가 딸이고, 아들은 연달아 넷이다. 아들네 집마다 돌아가며 손주들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다 돌봐주셨다. 막내딸인 나는 그 흔한 친정엄마 찬스를 한 번도 써보질 못했다. 내가 아들을 낳고 2박 3일간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몸조리를 해야 할 때도 엄마의 도움은 받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엄마는 한 살 터울의 손주를 세 명이나 동시에 돌보는 중이었다. 그 힘듦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엄마한테 투정 한번 부려보질 못했다. 엄마의 사랑과 추억이 담긴 두부찌개 그래도 엄마에게 사랑받는다고 느낀 시간이 있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이었다. 오빠 집에 합가 중이었던 엄마는 손주 여섯 명을 키워놓고 나서야 아버지와 함께 분가하셨다. 그때 엄마가 분가한 곳이 내가 운영하던 학원 근처였다. 초중등 학원은 보통 열 시쯤 문을 닫았다. 엄마는 가끔 전화해서 묻곤 하셨다. "밥 안 먹었지? 밥해 놓을 테니까 OO 데리고 와서 먹고 가거라." 초등학생이던 아들은 학원에서 저녁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다가 내가 퇴근할 때 같이 했다. 친정엄마는 막내딸인 내게도 외손주인 아들에게도 해 준 게 없어서 미안하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늦은 밤까지 밥도 먹지 못한 우리 모자를 위해 엄마는 가끔 늦은 저녁을 준비해 주셨다. 그건 엄마만의 사랑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