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이 참전하자 청주형무소에서는 부역자들을 남쪽으로 이감시켰다. 1950년 12월의 쌀쌀한 날씨였다. 탑동의 청주형무소에서 대전형무소까지는 90리(36km) 길이었다. 1950년 12월 청주형무소 형무관들은 재소자들을 다그쳤다. "전부 운동장으로 나와!" 정봉춘(1916년생, 청원군 강외면 궁평1구)은 영문도 모른 채 운동장으로 나왔고, 형무관들은 재소자들을 모두 묶은 후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재소자들을 남쪽으로 이감시키기 위한 조치로 짐작했다. 형무소에 화물자동차가 두 대 있었는데, 한 대는 전시에 징발됐고, 다른 한 대는 고장이었다. 결국 도보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정봉춘을 포함한 정치·사상범은 간수장 이정문의 책임하에 걸어서 남일면 고은리와 문의면을 거쳐 신탄진으로 향했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고문 후유증과 운동 부족, 영양 부족으로 더딜 수밖에 없었다. 점심은 고작 주먹밥 한 개였다. 설국열차 문의 못 미쳐 진눈깨비가 내렸다. 얼음 눈이 내리면서 얇게 입은 옷을 적셨다. 영하 10도의 날씨였다. 몸이 동태가 되어 밤 10시 30분경 신탄진에 도착했다. 학교 교실에 들어가 책걸상을 부수어 난로에 집어넣었다. 다음날 대전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콜레라와 장티푸스가 창궐했다. 대전형무소에서 이틀 밤을 잔 이들은 부산행 화물열차를 탔다. 지붕이 없는 기차 10량에 400명이 분산 탑승했다. 기차 안은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 앉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기차는 부산까지 느림보행을 했다. 충북 도내 경찰서와 청주형무소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한 재소자들이 숨도 쉴 수 없는 상태로 하루 동안 기차 안에 서 있었다. 화물차 두 칸에 정치·사상범과 형무관 및 피난길에 오른 형무관 가족까지 화물차에 탔다. 기차는 콩나물시루 같았다. 소변도 볼 수 없었다. 결국 서서 오줌을 지려야 했다. 기차는 가다 서다 다음 날 아침 10경에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역에서 화물차를 열었을 때 10여 구의 시신이 있었다. 얼어 죽고 장티푸스·콜레라로 죽은 시신이었다.(홍두표, <나의 여운>, 2006) 이때 재소자들을 인솔한 홍두표(1924년생)는 "부산형무소 화장실 길목에 수의를 입은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못돼도 200구는 됐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시신은 아무것으로도 덮지 않았고, 날씨마저 추워 동태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전국의 형무소에서 온 재소자들의 시신이었다. 전염병과 영양부족으로 죽고, 얼어 죽은 시신이었다. 청주형무소에서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0년 12월과 1951년 3월 초, 두 차례에 걸쳐 재소자들을 부산형무소로 이감시켰다. 위의 글은 1차에 이감된 윤용원과 2차 이감에 인솔자로 부산까지 동행한 청주형무소 홍두표 형무관의 기록과 증언을 기초로 했다. 부산형무소에는 전염병이 더욱 기승을 부렸다.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은 경찰 수사와 미결수 시절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과 전염병으로 산목숨이 아니었다. 그 결과 부산시 동대신동 2가 313번지 부산형무소에서는 수시로 시체가 나왔다. 당시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윤용원(1927년생. 청원군 남이면 행산리)은 "충남 연기군 동면 갈산리 오○○도 죽었다"고 한다. 청주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수감된 이들이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서 얼어 죽고 밟혀 죽었다면 부산형무소에서는 전염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죽었다. 그런데 죽음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서울·청주·대전·공주형무소 등지에서 이감된 이들을 포함한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에 대한 사형집행으로 하루에 수십 구의 시신이 나왔다. 윤용원은 "시신을 화물차에 볏짝 실 듯이 실었어. 시신을 형무소 뒷산에 매장했지"라고 증언한다. 우익인사 풀어준 사람이 빨갱이로...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