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 산책로 아래 35개의 파이프를 심은 건축가

크로아티아 자다르의 겨울은 '겨울 장마'라 불릴 만큼 비가 잦다. 회색빛 하늘이 일상이 된 날씨 속에서, 구름 사이로 아주 잠깐이라도 햇살이 비치면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선다. 가볍게 러닝을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올드타운으로 향하는 길은, 비에 젖은 돌바닥 위로 윤슬이 반짝이는 축복 같은 시간이다. 2월의 막바지인 지금, 지루했던 겨울 장마가 물러가고 자다르에도 서서히 맑은 날이 잦아지고 있다. 유난히 화창한 오늘,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올드타운의 서쪽 끝으로 향했다. 아드리아해를 마주한 하얀 대리석 계단에 다가가자, 어디선가 낮은 저음의 울림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거대한 고래의 깊은 울음소리 같기도, 먼 심해에서 건너온 신비로운 파동 같기도 한 이 기묘한 화음. 이것이 바로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든 악기, '바다 오르간(Sea Organ)'이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음악은 인간의 전유물'이라는 오만이 여실히 깨진다. 건축가 니콜라 바시치(Nikola Bašić)는 75m에 달하는 해안 산책로 아래 35개의 파이프를 심었다. 파도가 밀려와 공기를 밀어내면, 그 압력이 파이프를 통과하며 제각기 다른 높낮이의 소리를 만들어낸다. 지휘자는 아드리아해의 바람이고, 연주자는 밀려오는 파도다. 은퇴 전, 초 단위로 시간을 쪼개 살던 시절의 나는 '음악'조차 효율적으로 소비하려 했다. 이어폰을 꽂고 랜덤하게 설정 된 플레이리스트를 돌려 듣던 그 무미건조한 시간들. 하지만 이곳 자다르의 바다 앞에서는 그 어떤 플레이리스트도 무용지물이다. 파도가 거칠면 소리는 웅장한 교향곡이 되고, 바다가 잔잔하면 나른한 자장가가 된다. 정해진 악보가 없기에 단 한 순간도 같은 선율이 반복되지 않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위한 연주회다. 파괴의 흔적 위로 흐르는 위로의 선율 바다 오르간이 사랑을 받는 이유는 단순히 신기해서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다르의 아픈 현대사가 녹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자다르는 극심한 폭격으로 도시의 80%가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파괴된 해안가는 콘크리트 벽으로 재건되어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소외되어 있었다. 2005년, 이 죽어 있던 공간에 숨을 불어넣은 것이 바로 바다 오르간이다.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졌던 해안가는 이제 전 세계 여행자들이 모여 일몰을 기다리는 평화의 성지가 되었다. 파괴된 자리에서 피어난 예술. 그것은 상처 입은 도시가 스스로를 치유하고 세상에 건네는 가장 아름다운 화해의 방식이었다. 나 역시 은퇴라는 이름으로 익숙했던 삶의 한 챕터를 매듭짓고 이곳에 왔다. 오랜 시간 나를 지켜주던 직장이라는 단단한 울타리를 스스로 허물고 나온 직후, 마주한 세상은 이국적인 풍경만큼이나 낯설고 설레었다. 물론 정해진 궤도를 벗어난 것에 대한 약간의 일렁임은 있었으나, 아내와 함께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해온 은퇴였기에 그 불확실성은 오히려 기분 좋은 해방감으로 다가왔다. 바다 오르간의 낮은 울림은 그런 내게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했다. 비워진 자리에는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기 마련이고, 그 파동을 온전히 받아들일 마음의 통로만 열어둔다면 삶은 언제든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말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