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시대에도 백성들의 민의를 듣고자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다. 태종 때부터 실시된 신문고는 쇠가죽으로 만든 북을 대궐 문 밖에 달아놓고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나 관리의 비정(秕政)을 고발할 때는 직접 이 북을 치도록 하였다. 신문고 제도는 이미 기자조선 선혜왕 원년에 대궐 문 밖에 직언경(直言磬)이라는 경쇄를 달아놓고 누구든지 찾아와서 이 경쇄를 치면 왕이 친히 나와 그 사람의 말을 듣고, 또 왕의 허물도 기탄없이 받아들여 시정한 데서 기원한다. 성균관 유생(儒生)들에게는 임금이나 고위관리들의 전횡을 비판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확보되었다. 유생들은 '권당(捲堂)'이라 불리는 동맹휴학을 감행할 수 있었고, 사림(士林)들은 '유통(儒通)'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왕권을 비판했다. 조정에서 중요한 관리의 인사가 있을 때는 그 사람이 자질이나 도덕성에서 중망에 미흡하거나 공정하지 못하면 '청의(淸議)'를 일으켰다. 일종의 여론화 공론이다. 이밖에도 유생들은 왕이나 국정에 큰 잘못이 발생하면 '유소(儒疏)'라는 1차적인 항의를 하고, 이것이 거부되면 기숙사 입실을 거부하는 '공제(空濟)'를 하고, 그 다음 단계로 보따리를 싸서 귀가하는 '공관(空館)'을 한다. 성균관 유생들이 공관을 하게 되면 시정의 상인들까지 동맹하여 철시를 하여 임금도 유생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에는 '유향소(儒鄕所)'의 제도가 마련되었다. 지방관리의 횡포와 전단을 견제하고 지역사회의 여론을 민정에 반영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지방자치 기구인 '향약(鄕約)'을 기반으로 하여 지역사회의 큰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지방관 권한 밖의 치외법권적 존재로서 관리들의 불법을 견제토록 하였다. 유향소에서 선출한 풍헌(風憲), 이정(里正), 동약(洞約) 등은 오늘의 면장, 이장, 통장에 해당하는 직급이었다. 조선시대 언로기능의 제도적 장치 가운데 기본적인 것은 상소제도를 들 수 있다. 상소는 백성의 뜻을 정치과정에 투입시키는 일종의 소통방식이다. 상소에는 승정원에 직접 제출하는 '직정제(直呈制)'와 지방관을 통하는 '종현도상소(從縣道上疏)'의 두가지 전달방법이 있고, 통신의 방법으로는 '계언(啓言)', '의(議)', '서계(書啓)', '장계(狀啓)' 등 문서로 하는 것과, '계언(啓言)', '진언(秦言)' 등 구두에 의한 방법, '복합(伏閤)', '권당(捲堂)' 등 직소에 의한 방법이 있었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