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발사한 총알은 여섯 발이지만, 그 뒤에 또 다른 형태로 쏜 것은 2백 발이 넘는다. 그중 하나가 지난 20일 국내에 들어온 안중근 유묵이다. '가난하지만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는다'라는 빈이무첨 부이무교(貧而無諂 富而無驕)가 쓰인 서예 작품이 6개월 대여 형식으로 일본에서 반입됐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트린 뒤 순순히 붙들렸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는 "그때 나는 곧 하늘을 향하여 큰소리로 '대한 만세'를 세 번 부른 다음, 정거장 헌병파견대로 붙잡혀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토를 저격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대한 만세 외칠 시간에 몸을 피하거나 총을 더 쐈을 것이다. 그의 진정한 목적은 이토를 처단해 세계 이목을 집중시킨 뒤 일제 침략을 고발할 새로운 무대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스스로 붙잡혔다고 봐야 그의 이후 행보가 이해된다. 체포되는 그 순간부터 제2의 의거, 진짜 의거가 시작됐다고 보는 게 이치적이다. 체포 직후부터 그는 메시지 관리에 신경을 썼다. 거사 직후에 외친 '대한 만세'도 한국어가 아니었다. 1910년 2월 7일 공판 때 그는 "각국에서 통속적으로 사용하는 말로 코레아 후라라고 말하는 대한국 만세를 삼창하였다"고 진술했다. 그가 외친 코레아 후라는 국제공용어인 에스페란토어였다는 점이 오늘날 널리 인정되고 있다. <안응칠 역사>는 안중근이 17세 때 프랑스어를 배우다가 그만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일본말을 배우는 자는 일본의 종놈이 되고, 영어를 배우는 자는 영국의 종놈이 된다"라며 "내가 만일 프랑스말을 배우다가는 프랑스 종놈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서 폐한 것이다"라고 알려준다. 이처럼 제국주의국가의 언어를 경계하던 안중근이 제국주의의 거물을 쓰러트리는 자리에서 비(非)제국주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로 대한 만세를 외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중근은 조사를 받고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도 계속해서 메시지를 발산했다. 일본이 말로는 동양평화를 외치면서도 실상은 동양평화를 해치고 한국 독립을 침해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의 발언들은 일본 정부 수뇌부에 속속 보고됐다. 거사가 없었다면, 일제가 그의 말에 귀 기울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의거를 성사시킨 뒤 이처럼 열심히 선전한 일은 이토 처단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 곳곳에 폭탄을 터트린 의열단원들과 약산 김원봉, 도쿄에서 히로히토를 저격하려 했던 이봉창, 상하이에서 히로히토 생일 잔치에 폭탄을 터트린 윤봉길 등은 안중근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역사적 기여를 남겼다. 하지만 거사 직후의 메시지 관리 측면에서 안중근은 독보적인 면모를 보여줬다. 이것이 안중근 의거의 특징 중 하나다. 거사 직후 안중근이 보여준 독보적 면모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