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태극기와 일제 총칼의 싸움이었지만,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삼색기가 태극기 편에 서는 일도 있었다. 경기도 안성시가 편찬한 <안성시지 제6권: 인물자료집>은 "3·1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공안국 신부도 만세운동에 동참했다"라며 "야간 등불 행렬을 주도했고, 쫓기는 시민들을 성당으로 피신시켜 보호했다"라고 알려준다. 프랑스 이름이 앙투안 공베르(Antoine Gombert)인 공안국은 등불뿐 아니라 삼색기도 들었다. 그가 안성의 안(安)과 프랑스(법국)의 법(法)을 조합해 만든 경기도 안성시 안법고등학교(설립 당시엔 안법학교) 홈페이지의 '학교 소개' 난에 이런 설명이 있다. "일제 순사들에게 쫓긴 안성 사람들이 안성성당으로 몰려 들어가자, 공베르 신부님은 성당 문을 걸어 잠그고는 프랑스 국기를 들고 문 앞에 서서 맨몸으로 일본 순사들을 막았습니다. 그 덕분에 안성성당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목숨을 건졌고, 이분들 중 많은 분들이 해방 조국에서 독립유공자가 되셨습니다." 국가보훈부의 <독립운동사 제2권: 삼일운동사(상)>은 안성시 3·1운동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기다란 담뱃대에서 담배 끼우는 끝부분을 떼어낸 뒤 거기다가 태극기를 매달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담배설대라고 불리는 길다란 부분을 국기 깃대로 활용했던 것이다. "안성읍내 동리(東里) 윤순철·고성준·한국초 등이 주동이 되어 만세시위 준비를 하였다. 이들 3사람은 3월 31일부터 담배설대로 깃대를 만들어 간편한 태극기 70장을 만들었다. 이날 초저녁부터 고성준·한국초 두 사람은 안성시장에서 2백여 명을 모아 태극기를 나누어주자, 이 지방 주민들은 국기를 다시 보게 되어 감격하여 국기를 들고 열광적으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안성읍 3·1운동은 장터뿐 아니라 산에서도 열렸다. "안성읍 장대리에 사는 학생 주동섭과 당왕리에 사는 한삼석·권업동 등이 주동이 되어 3월 31일 오후에 동산에서 동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라고 위 책은 기술한다. 공안국은 야간 횃불시위를 주도했을 뿐 아니라 위와 같은 안성 시위대를 보호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시위대를 성당 안에 숨겨주는 데 그치지 않고, 성당 앞에서 청·백·홍 삼색기를 들고 일제 순사들과 대치했다. 그가 1901년에 건립한 안성성당은 시위대의 대피소였다. 이곳은 1919년판 명동성당이었다. 지역 주민들을 감동시킨 공안국의 노력 공안국은 1875년 4월 27일 프랑스 남부인 그랑 로데즈의 농촌 마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학교 교사이고 그는 둘째아들이었다. 그를 포함해 형제가 무려 17명이었다. <안성시지>에 따르면, 일찍 죽은 여덟 명을 제외한 생존자 9명 중에서 딸 셋은 가톨릭 신앙을 지키며 동정녀로 살았고 아들 넷은 신부가 됐다. 그의 형은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했고, 동생은 그와 함께 한국 선교사가 됐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