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설 연휴 첫새벽을 가르고 남도로 향했다. 전라남도 고흥군. 육지로부터 길게 뻗어 나온 반도여서일까, 섬의 정서를 품고 있다. 여정의 첫머리는 소록도, 녹동항을 출발하여 소록대교를 건넜다. 한센인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짧은 바닷길, 죽어서야 건널 수 있었던 그 바다 위를 자동차로 단숨에 가로질렀다. 오전 9시 이후부터 방문이 가능하다는 안내문. 너무 서둘렀나, 30여 분을 하릴없이 기다리기보다는 건너다보이는 거금도 휴게소에 다녀오기로 했다.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수군이 처음으로 합동작전을 펼쳤던 절이도 해전 기념비를 보기 위해서다. 국내 최초로 차량과 자전거 보행도로를 구분하는 복층구조인 거금대교를 건넜다. 거인상이 맞이했다. 웅크리고 있던 고흥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는 형상이라는데,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이 강렬했다. 바다는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선명한 푸른색이었다. 얼마나 짙은지 숨을 깊게 몰아쉬면 금세 온몸이 파랗게 물들어 버릴 것만 같았다. 슬픔을 안고 있는 아름다운 길 다리 너머 소록도(小鹿島)는 유난히 푸르렀다. 소록도에서 녹동항과 거금도 모두 헤엄쳐도 건널 듯 가까웠다. 다시 거금대교를 건너 국립소록도병원 방문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막연한 두려움과 근원을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동시에 일었다. 소나무 사이로 난 데크길에 들어섰다. 바닷길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 수려하고 정갈했다. 흰 모래와 푸른 솔이 어우러진 해변과 바닥이 말갛게 비치는 푸른 바다가 어린 사슴이라는 이름처럼 아름다웠다. 중앙공원과 박물관만 허락되었다. 한센병은 문둥병이라 불린 만성 감염병이다. 이 병에 걸린 이들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1916년 일제는 이곳에 자혜의원을 세웠다. 한때 6천여 명에 이르는 환자들을 수용한, 약 4.4㎢의 작은 섬, 결코 낙원은 아니었다. 일본인 원장들은 대대로, 환자들을 동원하여 섬 가꾸기에 열과 성을 다했다. 섬 일주도로를 닦고, 벽돌공장을 비롯한 감금실 등 수십 동의 건물을 지었으며, 공원을 조성을 위해 외부에서 들여온 관상수와 바위를 날라야 했다. 일본인 직원의 허락 없이는 쉴 수도 없었다. 강제로 단종수술(斷種手術, 불임수술)을 받고, 죽어서는 해부되었다. 죽음을 견디다 못해 나무토막이나 물통에 의지해 바다로 뛰어든 이도 많았다. 4대 원장 스오는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자신의 동상을 세워 참배까지 강요했다. 결국 환자의 칼날 아래 최후를 맞았다. 동상 앞에 있었다는 매끄러운 침상 같은 바위는 한센인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새겨진 시비가 되었다. 수탄장(愁嘆場)도 빼놓을 수 없다. 부모와 자식이 지척에 두고도 서로를 안을 수 없었던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소다. 매달 단 한 번, 전염을 막는다는 이유로 부모는 바람을 마주하고 자식은 바람을 등진 채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얼굴만 볼 수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가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이 되어 서로의 체온을 허락하지 않았다. 환자들은 탄식의 장소라는 의미로 수탄장이라 불렀다. 이제는 평화로운 산책로가 되었지만.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 가장 큰 아픔을 품고 있었다. 중앙공원 한복판, 하얀 구라탑(救癩塔)이 푸른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문구에 눈길이 머문다. 탑이 세워진 1960년대 초반, 소록도에는 전례 없는 활기가 돌았다. 한센병으로부터 완치된 사람들의 정착지를 조성하는 오마도 간척공사 때문이었다. 330만 평의 간척지를 확보하는 대공사였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