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러보세요, 한국 사랑한 외국 기자가 남긴 '궁전'

서울 창의문 고개에서 보이는 서촌이 차분하다. 분수령인 자하문 너머 종로구 부암동과는 또 다른 분위기다. 경복궁과 청와대를 비롯한 오랜 통치 공간이어선가. 자연스러운 차분함보다는 오랜 위력에 눌린 절제에 가까워 보인다. 어느 통치자가 이 공간의 건축 높이를 극도로 제한해 놓았다. 그 영향일까? 소리 높여 외치기보다 침묵하기로 다짐한 공간처럼 보인다. 일제강점기 서촌에는 나라를 팔고 민족을 배반하며 호가호위를 누린 자들이 있었다. 윤덕영과 이완용의 아방궁은 사라졌어도, 그 땅에 쌓인 분노까지 씻겨나갔을까. 아방궁이 남겼다는 작은 돌덩이만으로도, 하늘을 찌르는 분노를 능히 증명할 수 있겠다. 그 집들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얼마나 호화로웠는지는 기록에서만 엿볼 수 있다. 나이 든 서촌 골목은, 그런 사실을 애써 상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골목을 지날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침묵을 느낄 뿐이다. 말하지 않아도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리를 차지한 동네, 그것이 오래된 서촌의 인상이다. 시인을 기억하는 공간 윤동주 문학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자연스레 느려지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누상동에서 잠깐 시인이 하숙한 게 전부다. 서촌이라는 공간에서 상반된 삶을 살다간 이들이 어디 이들 뿐이랴. 문학관은 애당초 시인을 위해 지은 공간이 아니었다. 옛 수도 시설을 고쳤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지만, 막상 안에 들어서면 설명이 아닌 감각으로 다가온다. 시인의 시를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이 공간은 이미 충분히 절제되어 있다. 물을 저장하고 흘려보내던 구조가 시어를 담아 보내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시인의 노래가 여기서 낮게 흐르는 이유다. 물이 넘치지 않도록 설계된 공간에, 생각 역시 쉽사리 넘지 않는 건 그런 까닭일까. 뒷동산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영혼처럼 시인의 시가 배어있다. 겸재 정선이 이곳에서 남산을 보고 그림을 그렸다던가. 풍광이 고졸하다. 인왕에서 절제는, 이처럼 결여가 아니라 오히려 어느 경지에 다다른 여유다. 무상한 사랑과 권력 공원을 지나 능선에 오르다 보면, 도시 표정이 빠르게 유순해진다. 소음과 건물, 단조로운 콘크리트가 작아지고 흙과 돌, 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높이를 다투는 건물들이 얌전해 보이고, 곁의 백악과 멀리 남산까지 순응하는 모양새다. 성곽보다, 인왕은 성가퀴(성 벽위에 낮게 쌓은 담) 따라 오르는 길이다. 왕조시대 성가퀴에 1970년대와 2000년대 성가퀴가 족보처럼 열을 지었다. 이를 따라 인왕을 오르다 보면, 이 산이 도성의 경계이자 방어선이었음을 실감한다. 살아남은 성곽이 이를 설명하려 하나, 산은 자신이 어떤 역할이었는지 굳이 되새기려 하지 않는 듯하다. 부부 소나무란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를 잇고 있는 연리지가 따사롭다. 연리지를 지나 치받는 경사를 오르니, 멀리 치마바위가 넓적하다. 다정한 연리지를 시기했을까, 폐위된 단경왕후가 중종을 위해 치마를 걸어두었다는 널찍한 치마바위가 무표정해 보인다. 권력과 사랑은 정반대였을까. 바위에 그 무상함이 더 또렷해진다. 그러함에도 바위는, 권력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했던 중종의 처지를 증명하지도 반박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래 그 자리를 지켰을 뿐이다. 왜란과 호란을 겪고, 물적 토대가 탄탄해진 숙종 시대다. 양란의 황망함을 더는 겪지 않기 위해, 인왕산 성벽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간 외겹의 긴 성곽을 쌓았다. 기차바위를 지나, 세검정 홍지문을 지나, 멀리 향로봉을 향한 성곽이다. 전체 내용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