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박명림 교수)은 3.1민주구국선언 50주년을 맞이하여 이희호 여사가 1978년 9월 25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을 포함해서 이 사건 관련 사료를 공개했다. 1976년 3월 1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은 김대중,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당시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10명이 서명한 것으로서 유신 정권에 맞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저항운동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역사적인 가치와 평가와 달리 일반인들에게는 이 선언이 크게 알려진 상태는 아니다. 그렇게 볼 때 5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3.1절에 맞춰서 이 사건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3.1 민주구국선언의 내용과 전개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계엄과 함께 시작된 유신체제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앞세워 전체주의적인 독재정치를 강화했다. 국민의 자유를 빼앗고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다. 1975년 5월에 발표된 긴급조치9호는 그것의 절정이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 민주화에 대한 희망의 불씨마저 사라질 것을 우려한 민주인사들의 고민은 커져만 갔고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해보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장준하 선생이 유신체제에 맞선 공동투쟁을 본격적으로 협의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인데,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에 의문사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그 이후 나오게 된 것이 바로 1976년 3월1일 발표된 민주구국선언이다. 김대중을 포함해서 당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민주세력 지도급 인사 10명이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불씨를 살려내기 위해서 3.1절을 맞이해서 공동행동을 준비했다. 그리고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선언의 핵심 주장이다. 이 선언이 '사건'이 된 이유는 김대중을 포함한 민주 세력의 지도급 인사들이 공동행동에 나서면서 유신 정권이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유신 정권은 납치사건 당시 미국의 도움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김대중에게 해외 출국을 포함한 활동의 자유 보장을 요구하는 국제여론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선언을 '사건'으로 만들어서 김대중을 구속 수감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유신 정권은 김대중을 포함해 이 선언 관련 주요 관계자 11명을 구속하고 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그래서 이 선언은 '사건'이 됐다. 김대중은 1976년 3월 8일 연행되어 3월 10일 서울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1977년 3월 22일 징역 5년형이 확정되어 1977년 4월 14일 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김대중을 서울대병원 감옥병동으로 이감시킨 이유 김대중을 포함한 사건 관계자들은 한국의 민주 세력을 대표하는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미국, 일본, 유럽 등 국제사회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유신 정권의 강압적 독재정치에 대한 비난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1976년 미국 대선에서 인권외교를 내세운 카터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거세졌다. 유신정권은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을 의식했으나 김대중을 석방하는 것은 싫어했다. 그래서 고안한 반인권적인 꼼수가 김대중을 진주교도소에서 서울대병원 감옥병동으로 이감시키는 것이었다. 유신 정권은 김대중을 1977년 12월 19일 서울대병원 감옥병동으로 이감시킨 후 대외적으로는 신병치료를 위한 조치인 것으로 선전했다. 그런데 서울대병원 감옥병동은 진주교도소보다 훨씬 더 열악한 환경이었다. 햇빛을 볼 수 없게 창문 등을 막았고 집필도 허가되지 않았고 운동도 하지 못하게 했다. 유신 정권은 김대중이 병실 밖을 나설 수 없을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식으로 선전했기 때문에 김대중의 최소한의 인권를 보장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대중은 여기서 지낸 10개월을 매우 끔찍하고 괴로운 시간으로 회고했다. 그래서 1978년 12월 27일 석방 직후 수감 생활 관련하여 일본 아사히신문에 보낸 기고문의 제목이 '하늘이 그리웠다'였다. 전체 내용보기